방향성을 상실한 주제 그리고 공허함…
글 윤두현 _ 자유기고가
흙의 시나위는 90년대 이후 활발한 활동을 지속해 온 진취적 여성도예가들의 모임이다. 올해로 15년째를 맞이하는 흙의 시나위는 그 짧지 않은 시간의 궤적만으로도 도예계에 있어 무엇보다 큰 의의를 갖는 단체라 할 수 있다. 특히 동문 등 학맥이나 지연에 기인한 수동적이며 폐쇄적인 모임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미술계 전반의 특성을 고려할 때, 흙의 시나위가 지금까지 이를 지양하고 능동적이며 개방적인 의미의 단체를 부단히 추구해 온 것은 단체의 그 같은 의의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 흙의 시나위가 ‘여자’를 주제로 인사아트센터에서 15회째 정기전를 개최했다. 하지만 특별 초청한 13명의 남성 도예가들, 이른바 흙의 사나이들과의 공동전시를 처음 시도했던 전시 ‘흙의 시나위 2004’전은 그 기대만큼이나 아쉬움이 큰 전시였다.
전시 ‘흙의 시나위 2004’의 주제는 ‘여자’다. 그러나 총 31명의 작가가 참여한 이번 전시에는 그 주제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진취적인 목소리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전시장은 주제적인 측면에 있어서 일관성마저 상실하고 있는 작품들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으로 말미암아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부계적 사회체제 속에서 왜곡된 여성성을 해체하고 새롭게 여성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고자 하는 여성주의 혹은 페미니즘(feminism)적 요소와 함께 통속적 여성다움으로 표상 곧 사회문화적 성(gender)에 대한 왜곡과 여성의 생물학적 성(sex)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드러내는 등의 반페미니즘(antifeminism)적 요소, 즉 결코 상호 공존할 수 없는 대립적 요소들이 하나의 공간에 혼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설혹 기획의도 자체가 어떤 하나의 개념에 얽매이지 않고 단지 여성에 대한 참여 작가 각각의 자유로운 견해 피력에 있었다해도 요즘의 현실적 담론으로부터 괴리 또는 퇴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그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결국 이렇게 볼 때 대다수 그룹전이 겪는 일반적인 한계 즉 한정된 시간, 공간, 작품으로 주제를 표현해야 하는 적지 않은 어려움을 감안하더라도, 전시가 공허할 수밖에 없는 궁극적인 원인이 주제와 그 형상화에 대한 참여 작가들의 비판적 인식 부재에 있다는 혐의를 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으로 요즘이 기획자의 역할이 중시되는 시점이고 보면 그 같은 원인은 각 참여작가가 주제에 대한 일관적인 방향성 하에서 자율성을 표출하도록 하는 전문적인 기획력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아직도 흙의 시나위가 갖는 희망적인 가능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모임 자체가 갖는 의미만으로 현대도예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토대 자체가 실효적인 활동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마련된 토대 위에 다양한 담론의 숲을 일구는 것은 스스로의 철저한 문제인식을 바탕으로 한 방향성 모색이 전제됐을 때라야 만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울러 이번 전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아무리 진취적 그룹일지라도 잘 조율될 하나의 화음을 갖지 못 한다면 그 존재근거를 확보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흙의 시나위 구성원 스스로가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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