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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자사의 새로운 이해(11)
  • 편집부
  • 등록 2003-07-03 16:42:49
  • 수정 2016-04-17 00:2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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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자사의 새로운 이해(11) 조선백자 Ⅲ 글/최 건 광주조선관요박물관 관장 5. 조선시대의 백자관(白磁觀) 오늘 우리가 조선시대에 만든 백자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과 당시 조선시대에 살던 사람들의 생각과는 분명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마치 깊은 산 속에 사는 대자연의 일부로서 호랑이와 동물원 안에 갇혀 있는 구경꺼리로서 호랑이와 같은 큰 차이일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백자는 조선시대라는 현장에서 살아 숨쉬고 있던 백자가 아니라 옛 미술품이라는 박제된 이해의 틀 안에서―마치 동물원의 호랑이를 보듯―바라본 백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백자가 갖는 본래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본래의 의미를 알기 위한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은 바로 그 현장에 우리가 직접 가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역사적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한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한다면 바로 그 백자의 현장에 가서 보고 듣고 느낀 것과 같은 폭 넓은 이해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 조선시대 백자의 환경을 그려놓는 두 편의 시(詩)를 소개하기로 한다. <전 략> 검소함을 숭상하는 군왕의 법이 순수하여 자기 그릇을 쓰면서 금은 그릇을 물리쳤고, 백점토는 해마다 중원토(中原土)를 캐서 재질이 좋아 가을에 광주 산 나무로 굽는다네. 몸은 궁궐에 있는 분내원(分內院)을 나와서 강가에 공인(工人)을 전담하는 일을 하고, 草書는 공손랑의 칼솜씨를 빌어 터득했지만 도자기의 세계는 저 물레에 있다네. <후 략> 백자를 주제로 한 이 시는 16세기에 대표적 시인인 박상(朴祥; 1474~1530)의 작품이다. 그는 전에 군자감에 같이 있었던 사옹원(司饔院) 직장(直長) 권행(權行)을 분원에서 만나 헤어지면서 이 시를 썼는데, 군왕이 순수한 마음으로 사치스런 금은 그릇을 쓰지 않고 백자를 선택하여 근검절약의 규범을 보였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광주에 백자 번조소(燔造所)를 세우게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당시에는 충주지방에서 매년 백토를 캐 광주 분원으로 옮겨 쓰는데 백토의 재질이 매우 좋으며 광주에서 구한 나무로 굽는다는 내용도 전하고 있다. 권행은 원래 한양의 궁궐 안에 있는 사옹원 분원에서 직장 벼슬을 하고 있었으나 이 시를 쓴 당시에는 광주 현장에서 공인(沙器匠)들을 통솔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박상은 그(박행)의 초서 솜씨가 뛰어나 공손랑의 칼솜씨와 같은 경지라고 예를 들면서, 그러나 도자기의 경우에는 물레가 가장 중요한 존재라는 말을 하고 있다. 다음은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의 문집인 『두타초(頭陀草)』에 실린 시로서 1709년에 백자 묘지(墓誌)를 주문 제작하기 위해 직접 광주 분원에 가서 이 십여 일간 보고 듣고 느낀 내용을 적은 것이다. 앵자산(鶯子散) 북쪽 우천(牛川) 동쪽에 남한산성이 눈 안에 있고, 강 구름은 밤마다 이어 비를 만들고 산골 나무에는 긴 바람이 열흘이나 부네. 요인(窯人)들은 산모롱이에 사는데 오랜 부역에 괴롭다네. 스스로 말하기를 지난 해 영남에 가서 진주 백토를 실어 왔다네. 선천토 색은 눈과 같아서(白如雪) 어기(御器) 번성(燔成)에 제일이지, 감사가 글을 올려 노역은 덜었지만 진상품은 해마다 퇴물(退物)이 많아지네. 수비정토(水飛精土)한 흙은 솜보다 부드럽고 발로 물레(輪機) 돌리니 저절로 돌고, 잠깐 사이 천 여 개 빚어내니 우(盂).완(椀).병(甁).앵(櫻) 하나같이 둥그네. 진상할 기명은 삼십 여 종이요 본원에 인정으로 바칠 양은 사백 바리인데, 정교하고 거칠거나 색과 모양을 말하지 말게 바로 돈이 없는 게 죄일세. 회청(回靑) 한 글자를 은과 같이 아껴서 갖가지 종류를 그려도 색이 고른데, 지난해 대내(大內)에 용준(龍樽)을 바치니 내사(內司)에서 공인에게 면포를 상으로 주었다네. 칠십 노인의 성은 박씨인데 그 안에서 선수장(善手匠)으로 불린다네, 두꺼비연적은 가장 기이한 것이며 팔면당호(八面唐壺)는 정말 좋은 모양이네. 이 시의 내용은 제작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적은 것이어서 다른 어떤 기록물보다 생동감 있다. 예컨대 앵자산 북쪽 우천 동쪽은 지금의 정지리인데 여기에는 18세기초기의 특징을 나타내는 백자가마터가 그대로 남아있으며, 또 이 곳 산언덕에 오르면 남한산성이 가깝게 보이는 등 위의 시 내용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물이 많고 골이 깊어서 안개가 짙으며 골바람이 긴 것까지 옛과 같다. 요인(沙器匠)들의 고달픈 삶은 여전하며 지난 겨울 경남 진주에서 백토를 실어 오는 등 힘든 여정을 겪었다는 하소연을 덧붙이고 있다. 백토는 광주를 포함하여 경주, 진주, 양구,봉산, 사산, 가평, 인제, 홍천, 춘천, 곤양 등 전국 각지에서 실어 오며, 그 가운데 선천토는 설백(雪白)색의 가장 순수한 백토로서 어기(御器)를 만드는 데 특별히 쓴다고 하면서 선천 고을의 감사가 백성들의 고달픔을 덜기 위해 진상하는 양을 줄였다는 사실도 전하고 있다. 그런데도 백자를 만들어 바치면 품질기준에 모자란다고 하여 불합격시키고 이것을 불법 갈취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다시 많은 백토를 써서 만들어 바치면 다시 불합격시키는 등 악순환이 계속되었던 것 같다. 물론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었던 것은 아니다. 18세기 들어서 국가 경제가 전반적으로 상승하면서 생활 환경이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처우와 신분 문제는 조선사회의 경직성 안에서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백토는 수비과정을 거쳐 정갈하고 부드러운 태토로 만들었다. 사실 수비라는 말은 처음 백점토와 사토를 물에 풀어 까불리며 혼합하는 수파과정과 미세한 태토를 걸러 침전시킨 후 반건조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과정 전체를 수비라는 말로 대신하였던 것 같다. 최근 발굴한 조선백자 가마터에서 사각형의 수파통과 역원추형으로 깊게 파진 침전조, 온돌과 같은 형식의 수비(건조)장이 나타나서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고급 갑번(匣燔)백자의 경우 수비 정토(精土)가 원칙이며 분원의 번조관들이 시번(試燔)하여 품질과 색택(色澤)을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여 선별하였다. 최상품의 경우 국가의 막중대사인 왕실용 제기(祭器)와 어기(御器), 외국사신의 접대용으로 사용하였는데, 이 때에는 법전에 나와있는 형태와 규격 기준을 엄하게 지키기 때문에 새로운 창의적 형태를 만들거나 장식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다. 조선시대 백자에 나타나는 정체성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잠깐사이 천여 개를 빚어낼 정도로 능숙한 물레 기량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사발, 완, 병, 술항아리와 같이 물레에서 성형하는 둥근 그릇이 보편적인 것이며, 공식적인 진상품의 종류는 삼십 가지였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선물인 인정(仁情) 명목으로 사백 바리나 받쳤던 것 같다. 공식적인 진상품의 경우 분원 설치의 목적이며 의무이기 때문에 원료 조달과 제작에 드는 비용이 모두 공식적으로 지급되는 것이지만, 고위관리들에게 비공식적으로 바치는 인정 품목의 제작비용은 모두 분원이 떠맡아야 하는 부담이 되어 사기장들에게 고통을 주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이런 부조리 가운데 밀매도 부분적으로 있었다. 이하곤 자신에게 돈이 있어 백자를 사고자하면 좋고 나쁘건 어느 것이나 현장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분원에서 생산한 백자는 진상품과 공적 용도로 먼저 쓰고 남은 것은 절차를 밟아 시전(공식 시장)에서 판매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경우처럼 제작현장에서 비공식적인 판매도 일부 가능했던 것 같다 이 시대에 와서 전에 금(金)처럼 비쌌던 회청(산화 코발트) 안료의 값이 은(銀)과 같은 수준으로 낮아졌으며, 품질도 우수해서 발색이 좋았던 것 같다. 청화로 용을 그려 넣은 큰 술항아리인 용준(龍樽)은 국가와 왕실의 중요 행사에서만 쓰는 특별한 품목이었다. 용항아리의 경우 그것을 만들어 바친 사기장에게 왕실 담당부서에서 직접 상을 내릴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현재 남아 전하는 50㎝ 높이의 대형 용항아리가 불과 십여 점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바로 그러한 특수성을 설명해주고 있다. 성이 박가인 칠순 고령의 사기장이 가장 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기량이 뛰어나기 위해서는 수십 년의 경륜이 필요하다는 말인데 최근에 우리 현대 도예가들의 조로 현상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6. 조선백자의 특징 한국 도자문화에 관해 말할 때, 도자에 대한 인식 방향과 입장에 따라 각각 다양한 표현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조선백자의 전개과정을 몇 백년이 지난 후 근대 산업사회의 입장에서 볼 때, 중국과 일본과 유럽을 포함하는 세계도자의 경향과 다르게 진행되고 있던 조선백자의 17세기와 18~19세기를 제작기반의 쇠퇴와 기술적 낙후로 인하여 세계의 중심에서 탈락되어 가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아마 19세기후반에 근대적 도자산업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일본과 유럽이 조선백자에서 민예(民藝)적이며 소박함과 가공되지 않은 자연적(自然的)인 미(美)라는 것을 찾아낸 경위도 바로 산업화에 성공한 그들의 입장에서 비산업화 상태에 머물고 있었던 조선백자를 보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실 최근에는 그러한 판단들이 조선백자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민예적이나 소박함 등과 같이 비산업화를 암시하는 표현들은 근대 산업사회의 입장에서 조선백자를 바라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조선백자의 재질은 원료가 정제된 고품위의 재질과 고화도 환원염 번조(燔造)로 완벽한 경질백자의 수준에 올라 있는 고품위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기술적으로 최고수준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소위 가공되지 않은 자연의 미(美)라는 표현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 조선백자는 기종이 단순 간결하고, 장식적 요소를 가능한 생략하여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준수한 형태를 기준으로 하고, 순백색 바탕을 존중하되 꼭 필요한 경우 청결을 상징하는 푸른색 안료로 절제(節制)의 과정을 통하여 함축적인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방식을 항상 유지하고 있었다. 드믄 경우이지만, 청화 안료 외에 다른 색을 사용할 때에도, 손쉬운 저화도 유상채를 쓰지 않고 고난도의 고화도 유하채를 사용하여 표면적인 화려한 색채 보다 내면의 진중한 색을 이끌어 내려 했는데, 아마 이러한 고품위에 대한 자부심이 화려한 디자인으로 장식된 중국과 일본과 유럽세계가 지향했던 중상주의(重商主義)적 도자관(陶磁觀)과 달리 조선 독자의 도덕주의(道德主義)적 도자관를 형성하게 된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도자문화에 나타나는 본질을 중시하는 간결하고 절제된 표현은 전통적으로 계승되어 온 물질 자체에 대한 외경심(畏敬心)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농업사회를 기반으로 유교적 검소·검약 사상을 인간이 만들어내는 물질문명에 담음으로써 자연에 대한 아낌과 존중의 도덕적 정신을 구체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호화로운 장식과 기교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순수함을 고전적으로 표현(본래의 것으로 되돌아가려는)하는 경향으로 나타나 오백년 조선백자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오늘날 세계적 유행이 표면적 장식과 호화스러운 상품으로서 중상주의를 향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물질 고유의 성질을 그대로 존중하면서 백자 내면의 미적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신중하고 겸손하게 표현하려 했던 우리 도자문화의 도덕주의적 입장이 오히려 더 높이 평가될 것으로 생각한다. (다음 호에 계속) 필자약력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도자사 전공) 목원대학교 교수 역임 해강도자미술관 연구실장 역임 현, 문화재전문위원 광주조선관요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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