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5.26 - 2004.6.1 가나아트스페이스
죽어야 산다? - 현대도예의 새로운 가능성
글 윤두현 _ 자유기고가
작가 이경수의 작업은 의심할 수 없는 존재론적 근거로서 이미 오랫동안 인식, 유지되어 오고있는 도예의 전통적 형식과 고정관념에 대한 근본적 회의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일관되게 지속해 온 그 회의의 종착점에서 작가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결국 일체의 전통적 형식과 고정관념이 배제된 일차적 요소로서의 오롯한 흙 자체다. 무엇보다 이 출발점으로부터 시작되는 작가의 작품들은 그간 현대도예계의 어깨를 짓눌러왔던 무거운 짐을 덜고 매너리즘의 늪에서 벗어나 바야흐로 현대도예가 진일보할 수 있는 새로운 미래적 지향점에 대해 핵심적인 실마리를 제공한다.
‘alike and unlike’를 부제로 한 이번 전시에서 각각의 작품들에는 검정색의 발색효과를 위해 고안된 별도의 태토가 사용되었으며, 안료와 유약은 각각 작품들의 성격에 따라 선택적으로 사용되었다. 이와 함께 에폭시, 사진프린트를 비롯하여,(비록 이번 전시에 출품되지는 않았지만) 자개 등의 다양한 소재들을 작품속에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더불어 이들 작품을 통해 작가는 우선적으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개개의 획일화되고 단자화된 삶의 권태로움과 쓸쓸함에 주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개개의 작지만 개성적인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부정 속의 긍정을 발견해내고자 한다. 특히 이러한 의도는 그의 작품 속에 동시대성을 담고자 하는 노력의 다름이 아니며, 나아가 여기서 언급하는 동시대성이 함의하는 바는 곧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문제이면서 곧 나의 문제”에 대한 천착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작가가 보여주고 있는 도예의 전통적인 형식과 관념에 대한 극복에의 의지가 단지 형식을 위한 실험에만 그치는 공허함에 머물지 않게 되는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에 있어서 예술작품이 그 본의적 의미로서 가치 있는 예술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다면, 과연 그에 대한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했을 때, 그것은 아마도 실험적 창의성과 동시대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죽어야 산다’라는 다소 과격해 보이는 문구가 의미하는 바처럼 현대도예가 궁극적으로 진일보 할 수 있는 실질적인 토대는 바로 도예 자체에 대한 철저한 회의에서 비롯될 수 있으며, 이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심도 있게 조명함으로써 그 현재적 위치를 가늠하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할 때라야만이 가능할 수 있다고 본다. 결국 작가 이경수의 시기적인 측면에서 일반에 비해 다소 늦었다고 할 수 있는 이번 첫 개인전이 전시 외적인 측면뿐 아니라 내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상당한 의미를 갖는 전시라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모범을 보여줌과 동시에 긍정적인 가능성 역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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