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그릇의 서러운 역사 - 이름도 없는 역사는 그래서 서럽다
지난 여름은 대단한 무더위의 계절이었다. 폭염 위세에 가위눌린 대지는, 더욱 건강한 여름으로 있으면서 귀한 열매를 내어줄 가을을 잉태하고 가로수의 화사한 백일홍은 분홍색으로 길단장이 한창이다. 매미들의 합창이 때로는 청량제로, 짙어질 대로 짙어진 들풀도 기나긴 밤동안 조용히 내린 이슬 한모금으로 생명을 키워왔다.
그러나 아직 조금 남아있는 여름의 자투리에 서서 목이 쉰 매미의 울움이 공허한 하늘, 거기 나는 고추잠자리에게 전달되는지 어쩐지 그 너머에 푸른 창공이 너무도 푸르러서 시리다.
야트막한 동산들을 안고있는 대룡산(전남 보성 미력 소재,해발 440m)이 내어놓는 아침해는 어제의 햇살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 햇발로 인하여 또 다른 계절이 예비될 것이다.
날이 샐 무렵 공방의 텅텅거리는 소리의 울림 끝에는 금방 써도 좋을 만큼의 어깨가 딱 벌어진 굵직한 항아리가 물레를 장식한다. 흙내음 가득한 독막을 새로 들어온 공기와 바깥 풀벌레들의 소리로 가득 채우면 금새 우람한 독이 하나 탄생한다. 몸집이 좋아 독 어깨에 목질띠를 둘렀는데 나중에 가마에서 익혀지면 된장이나 간장 또는 김치 항아리로 우리를 살찌우는 친구가 될 것이다.
이렇듯 공방은 몇날만 지나고 나면 별천지 세상이다. 식기로, 찌개가 부글부글 끓는 솥으로, 곱디고운 정화수 항아리로, 더러는 쌀독으로, 이쁘고 아름다운 꽃을 생명으로 보존하는 화병으로, 탁자로, 의자로, 양념단지로, 꿀단지로, 가습기로, 우리 키만한 물항으로 입이 딱 벌어진 소래기들들… 놓일 만한 곳에 놓아두고 이름지으면 곧 그릇의 이름이 되어 우리들을 평화롭게 하며 건강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는 것이다.
그 옛날 그러니까 수천여년 전부터 지금까지 그래왔다. 이 여러 심성과 자연을 담아 만들고 굽고 그래왔던 것이다. 각설하고,
지금까지 세간에 알려진 옹기(질그릇, 오지그릇, 자기 이외의 그릇)의 역사는 밝혀진 내용이 거의 없다. 그저 도자기의 범주로 간주되어 가마발굴터의 편린들, 부장품들 중에 도기들을 보면서 연대를 추정해볼 뿐, 또 조선조 때의 간행물들을 통해서 해석해볼 뿐 정확한 내용의 자료도 없으며 따라서 옹기 역사를 알아내어 밝혀보는 일은 이 시대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 삼국시대나 고려조에서 도기의 아주 작은 일부분만으로 옹기의 전신으로 표현하고 있는 실정이다.
철기를 잘 다루는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부족들의 통폐합이 삼국으로 나뉘어 공히 도기의 질양이 몰라보게 발전하게 된다. 우선 굽는 기술의 발전을 꼽을 수 있겠다. 쇠다루는 기능이 도기에 접목되면서 정교하고 세련된 기물이 만들어졌고 나라마다 약간씩 다른 특색을 갖게 된다. 이것은 뒤에 통일된 국가에서도 지역적인 특징으로, 기후적인 여건에 따라 형태와 기능이 분화하게 된다.
조선중반부터는 질그릇이라 할 만한 옹기가 만들어졌다.
농경이 주류였던 사회에서 건강한 젊은 일꾼의 한지게 가득 진 모습은 전라도 항아리로, 젖을 물린 인자한 아낙의 풍성함은 경상도 항아리로, 어쩌면 위풍당당한 한복의 모습은 충청도 항아리로 태어난 것이다.
조선왕조 거의 끝 무렵 한 외국인에 의해 촬영된 가마굽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 시대를 조금은 들여다 볼 수가 있었다. 질그릇가마에서 구워진 회흑색 그릇들이 일상의 그릇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시대에 폭넓게 쓰여진 생활용기였다. 근대로 접어들면서도 여전히 쓰기 위해 만들고 편만하게 사용되던 우리네 필수 그릇이었다. 그러던 것이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위 개발에 밀리고 서양의 값싸고 질긴 그릇(고무 스텐레스 플라스틱 비닐 등)들이 자리를 차지하면서 하나씩 둘씩 자리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것도 서러운데 우리것은 천하고 하잘 것 없는 것으로 여겨져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땔감으로 쓸 나무 구하는 일이 만만치가 않았다. 왜냐하면 민둥산 보호한답시고 도무지 산엘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고 그때까지 벌채된 굵고 큰 나무들은 어디론가로 가고 주변의 잔 솔가지나 가져와 때든지 하고는 없어서 가마불 지피는 일이 그야말로 큰 일이었던 것이다. 이 때를 전후로 일본에서 들여온 광명단(화공약품, 인체에 유해한 납성분이 함유됨, 저화도 유약의 원료로 쓰임)을 잿물(나뭇재, 약토의 적당한 섞음으로 옹기의 유약)에 넣어 그릇 표면에 칠하여 구우면 유별나게 광택을 내면서 낮은 온도(약 1100도 미만)로도 잘 구워진 것처럼 보이며 겉면에 윤기가 나면서 좋게 보인다. 이는 땔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을 타개하는 돌파구로 생각한 옹기쟁이들이 너나없이 구하여 무분별하게 넣어 쓰므로 한동안은 이런 국적없는 옹기가 양산되었다. 이러한 옹기가 인체에 어떤 영향을 주는 지에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필자가 아는 한 한 세대가 넘도록 광명단 옹기가 판을 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예전 그 시절에는 돈이면 만사가 오케이었다. 지금은 알만한 이들은 다 알지만 이 옹기는 인체가 필요로 하지 않은 납이 많이 묻어나와 한동안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요즈음도 간혹 이러한 옹기들을 사서 쓰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참고로 이런 유의 그릇들은 옹기고유의 좋은 기능들을 거의 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용물이 쉽게 변하여 썩게 된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 제위께서는 집에 있는 옹기들 중 혹 그러한 그릇이 있는지 꼭 한번 확인해 보시기를 권한다. 부연하여 한가지 더 밝혀 드리자면 온갖 좋은 먹거리들을 잘 보관하는 냉장고의 문을 한번 열어보시기 바란다. 그 속에는 그릇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인데 오호라! 우리를 죽이는 것들이라니! 아무리 건강에 좋은 음료라 해도 그걸 담고 있는 그릇이 몸에 이롭지 못하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소위 환경호르몬이 다량으로 들어 있어 우리들의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설상가상,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싶다.
우리 전통적인 것에 대한 하대와 땔나무의 부족으로 인한 어려움, 그리고 힘들고 돈이 되지 않는 등 불리한 여건으로 인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하면서 문을 닫는 곳이 늘어갔다. 수년만에 가마가 거의 없어졌으며 이제는 옹기공방이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다.
이러한 현상을 예의 주시하던 몇몇 뜻있는 분들의 수고와 조사작업 끝에 지난 1990년 들어 국가 문화재로 옹기장인 세 분을 지정하기에 이른다. 다시 이들을 통해 되살아난 옹기의 문화가 점차 확산되던 중 지난 93년과 94년 그리고 2001년에 세 분 모두 작고했다. 한편으로 문화부에서는 지방에서 옹기장을 지정하도록 권고한 끝에 또 몇 분이 지정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직도 국가가 지정한 옹기장은 없는 실정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젊은이들 여럿이 옹기에 대한 열정을 갖고 꾸준히 작업하고 있기에 옹기 본래의 위치를 찾을 날이 오리라 확신하며 거기에 굳은 믿음과 신뢰를 보낸다.
짧은 지면을 통해 고대의 의미와 근대,현대의 흐름을 짚어 보고 서술한 내용에 대한 결론은 이렇다.
고대 질그릇의 역사는 훗날 고대의 그릇들이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귀를 쫑긋이 하여 들을 준비를 갖추고 우리들도 그날이 빨리 오기를 학수고대하자. 근대와 현대의 그것들은 앞으로 충분히 풀어가 볼 것이다. 모두가 동참함으로 좋은 역사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다음에 만날 때는 옹기를 만드는 방법을 곁들여 설명하고 표현을 통해 독자들과 직접 만들어 보기를 바라면서 크고 듬직한 항아리 꿈을 꾸시라!
큰 그릇을 꿈꾸시라!
필자 이학수씨는 전남 보성 미력면에서 9대에 걸쳐 300여년간 전통옹기를 고집스레 지켜온 미력옹기의 대표이며 중요무형문화재 96호 옹기장 전수자다.
e-mail : onggikam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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