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윤두현 _ 독립큐레이터
서울산업대학교, (재)한국공예문화진흥원, 공예디자인혁신센터(서울산업대학교 산하)의 공동주최로 <2005 아시아세라믹스네트워크>가 (재)한국공예문화진흥원 전시관과 관훈갤러리 신관에서 개최되었다. 전시기간 중 바비엥 호텔 컨벤션센터와 서울산업대학교 도예관에서는 아시아 각국의 도예가들이 참여한 세미나와 워크숍이 함께 열렸다. 이번 전시에는 중국, 일본, 싱가포르, 인도,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8개국의 작가 25명과 국내작가 90여명이 참여하였다. 도예의 본류로서 아시아의 위상 복권과 도예 활성화를 위한 아시아 도예 네트워크 구축을 목표로 개최된 이번 행사는 거창한 포부만큼이나 아쉬움을 많이 남겼다. 본 지면에서 필자는 <2005 아시아세라믹스네트워크>를 직접 참관하며 느낀 점을 통해 도예계의 현재와 미래를 비판적 시각으로 조명해보고자 한다.
이상과 실제의 간극
최근 국내 미술계 전반에 걸쳐 두드러지는 경향의 하나는 지난해 《먼지 한 톨 물 한 방울》이라는 주제로 5회째 개최되었던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하여 <부산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등 메가급 전시행사 개최의 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행사들은 공통적으로 서구미술 중심의 수동적 수용이라는 지형적 한계를 극복하고 위상적 정체성 제고에 의한 차별적 담론의 장을 마련함으로써 한국 현대미술을 활성화하고자 하는 담대한 포부와 함께 출발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도예 분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경기도세계도자비엔날레>,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아시아세라믹스네트워크>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외에도 축제, 전시 및 학술교류 등 다양한 행사들이 도예 활성화라는 취지 아래 개최되거나 계획되고 있다.
을유년 새해의 시작과 함께 열린 <2005 아시아세라믹스네트워크 Asia Ceramics Network 2005>(이하 ACN)는 도예의 본류로서 아시아의 지위를 복권하고자 하는 의도 하에 아시아권 도예가들 간의 상호교류와 연대를 모색하기 위해 기획된 행사이다. 이에 대해 한 참가자는 ‘NCECA’, ‘IAC’ 등의 국제도예단체들이 도예의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는 미주, 유럽과 달리 아시아권에는 도예가 갖는 전통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국제 규모의 단체가 없음을 지적하고, 그런 점에서 이번 ACN의 출범은 상당히 희망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하고 있다. 기실 침체된 도자예술의 부흥이라는 화두가 거론된 것은 이미 오래지만 그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찾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이처럼 아시아 국가들 간의 상호 교류와 연대를 위한 네트워크 구축의 필요성에 주목하는 것은 일견 매우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바람직한 취지를 갖고 있다하더라도 실제에 있어 그러한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결국 선언적 문구로만 그친다면 그것만큼 공허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번 ACN은 이상과 실제의 간극 속에서 공허했다.
한편 ACN 운영위원회 측은 상당히 촉박한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별 무리 없이(?) 행사를 개최함으로써 본격적인 네트워크 구축의 시금석을 마련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자평했다. 요는 곧 “시작이 반이다”라는 것이리라. 과연 그런가?
아시아 도예의 정체성 확립, 어떻게?
ACN이 네트워크 구축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내건 화두는 아시아권 도예가들의 교류와 연대에 의한 아시아 도예의 정체성 확립이다. 이는 물론 중요한 화두다. 그러나 문제는 의당 뒤따라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구체적 내용과 실천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왜냐하면 사전준비의 허술함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아시아 도예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위상을 복권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도예의 현재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갖고자 하는 충분한 사전준비와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철저한 사전조사와 분석에 따른 지평을 마련하고, 그 토대 위에서 아시아 도예의 현재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선행되었을 때라야 바람직한 방향의 설정 즉 차별적 정체성 확립과 활성화를 위한 나름의 구체적 방법론을 도출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일정의 물리적인 시간이 요구되는 것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ACN 운영위원회는 이를 위해 얼마나 치밀한 사전준비를 했는가에 대한 추궁이 필요하다. 결국 위와 같은 맥락에서의 사전준비가 충실히 있었는가라는 점에 있어 매우 회의적인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을 듯하다.
어쩌면 이에 대해 일단은 행사를 개최한 후 참여 작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전시와 함께 세미나와 워크숍을 개최함으로써 구체적인 방법론 등을 모색해나가는 형식이 애초부터 구상됐다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전시는 전통도자, 현대도자 등이 각각의 작품성격이나 지역성 등 어떠한 체계적인 범주category없이 나열식으로 구성되었을 뿐 아니라, 작품도 크기에 관계없이 한 점씩만 출품되어 각 작가들의 특성을 제대로 살피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틀간 바비엥 호텔과 서울산업대학교에서 열린 워크숍과 세미나는 아시아 도예의 현재에 대한 실질적인 지평을 마련하기에는 각 참가자의 발제를 위해 할애된 지면이 빈약할 뿐 아니라, 프레젠테이션 역시 거개가 제한적인 작가의 작품들을 소개하는 데 그치고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인도, 태국, 베트남… 등 지금까지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권 국가들의 도예가들이 초대되어 다소나마 그들 나라의 도예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나름대로 인상적이었다.
운영위 측에 의하면 한국, 중국, 일본을 제외한(중국, 일본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은 모두 1명씩 참여했다) 아시아 국가의 도예가들을 찾는데 무지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충분한 사전조사 없이 사실상 이전까지 교류가 거의 없었던 지역에서 그 것도 한 나라를 대표할 만한 작가를 찾는 일이 어디 쉬울 수 있었겠는가? 그런 점에서 보면 어떤 기준에서 선정했는지의 문제를 거론하기 이전에, 과연 작가 한 사람이 자국의 도예흐름 전반에 대한 객관적 판단을 그것도 단시일의 준비로 제시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만으로도 사전준비의 허술함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리들만의 리그
공예 분야를 저급미술로 치부하는 경향이 여전히 심각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례로 지난 한 해 동안 주요 미술매체이라고 할 수 있는 「월간미술」을 비롯한 미술 전문지만 보더라도 공예 분야가 얼마나 소외되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필자가 도예 분야에 한정하여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월간미술의 경우 2004년을 통틀어 도예전시에 대한 기사는 겨우 김익영(9월호), 이헌정(12월호) 정도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타 공예 분야 또한 오히려 그보다 더 했을망정 덜 하지는 않다. 물론 여기에는 미술계에 팽배한 왜곡된 인식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도예계 자체의 폐쇄성도 이러한 상황을 심화시키는 주요한 원인의 하나이다. ACN 역시 그러한 한계를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운영위원회는 도예가 겸 교수나 강사로 활동하는 몇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시 개막식, 워크숍과 세미나에 등에도 도예작가만 있을 뿐 그 외 미술계 인사들을 찾아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물론 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순전히 작가의 몫이지만 작품의 의미를 새롭게 하고 이로써 신선한 담론의 장과 소통의 통로를 마련하는 것은 결코 작가 혼자 힘만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미술계 각 분야 간의 긴장관계라는 상보적 메커니즘을 통해 작가는 보다 적극적으로 대중 속에 설 수 있다. 결국 도예 관련 전문 연구인력 및 큐레이터나 평론가 나아가 도예전문 전시공간 등의 절대적 부재를 거론하고 있는 궁극적인 이유 또한 그러한 요구의 다름이 아니다.
또 다른 한 편으로 여타의 상황논리는 있겠지만 참여 작가의 선정기준이 애초에 일부 강사나 교수에 국한되어 있지 않는 것이라면, 이번의 ACN이 편파성의 의혹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운영위 측이 표방한 대학 중심의 네트워크 구성도 분명히 일부 대학의 교수와 강사만의 참여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ACN은 해외는 차치하고라도 국내 참여 작가의 구성이 편향되어 있지 않다고 과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 이번 ACN에 참가한 국내 작가들 대부분이 교수나 강사였으며, 학교에 적을 두지 않은 전업작가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학교에 적을 두고 있지 않는 젊은 작가들을 폭넓게 수용하여 지속적으로 발굴, 지원하는 문제는 ACN의 미래, 나아가 도예계의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경계를 넘어
비단 도예계 뿐만 아니라 미술계 전반에 걸쳐 내적 성찰과 쇄신이라는 요구에 당면하고 있다. 오늘날 도예계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는 외연의 확장에만 급급하여 정작 이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내적 성찰과 쇄신을 외면해 온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적 성찰이란 다름 아니라 도예계의 현재에 대한 냉정한 자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ACN의 경우에서도 이러한 자세가 필요하다. 발전을 진정으로 성취해 나가는 길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한 번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물론 여러 어려운 여건 하에서 재정을 확보하고, 짧은 기간임에도 행사를 과감하게 개최하는 등 운영위 측의 추진력은 매우 높이 살만한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과감한 시작만으로 박수를 받을 수는 없다. 시작은 그 자체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첫 단추를 어떻게 끼우느냐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사전준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며 또한 아예 기획 단계에서부터 도예에 국한하지 않는 다양한 전문가들의 실질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즉 기획 단계부터 미술계를 포함한 여타 분야와의 적극적인 연대 및 참여유도를 폭넓게 시도함으로써 도예의 미학적, 대중적 가능성을 재발견하고 확장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충분한 자성과 열린 자세가 전제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나아가 이러한 자정적 환경을 고취하기 위해서라도 국내 유일의 도예 정기간행물인「월간도예」의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각오로 제반 도예행사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는 것 또한 절실하다. 「월간도예」가 그간 여타 도예 관련 행사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거의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각각의 위치와 역할을 통해 내외적으로 건강한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이로써 제반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갈 때라야 만이 ACN뿐 아니라 우리의 도예가 대중과 세계 속에서 비로소 여유 있는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약력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예술기획전공
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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