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전통 도자의 우수성을 이어받기 위하여 일생을 바친 1세대 작가의 생활과 작업에 얽힌 이야기를 녹취한 것이다. 금회는 고려청자의 재현에 전력한 고故 해강 유근형海剛 柳根瀅옹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1950년대의 도자기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전통도자의 성립과 전대에 대한 구체적인 현황을 밝혀보았으면 한다. - 경기도문화재전문위원 최선일
일 시 : 2005년 2월 20일(일요일)
장 소 :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수광리 해강도자미술관
대담자 : 유광렬 관장
사회자 : 김지희
참석자 : 강사 최선일 외 단국대학교 디자인대학원 도자디자인학과 5명
최선일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2004년 2학기 단국대학교에서 한국도자사를 강의하면서 전승 1세대들의 삶과 작업에 관련된 자료가 전무하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새로이 작업을 시작하는 학생들에게는 전승 1세대들이 가졌던 집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1세대 선생님과 주변에서 같이 생활한 분들을 찾아뵙고 자료를 녹취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비색청자 재현에 평생을 바치신 해강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유광렬 최선생이 강진청자박물관에서 특별전과 세미나 개최하느라 고생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는데, 요즘은 통 소식이 없다고 생각했죠.
최선일 당시 지역박물관에서 일하다보니 번번이 관장님께 유물을 빌려달라고 부탁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때마다 유물을 대여해 주셔서 지역에 있는 박물관이지만, 의미있는 전시회를 개최할 수 있었습니다.
유광렬 김지희씨가 전화로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 달라고 부탁해서 쉽게 승낙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지는 몰랐어요. 그래도 젊은 작가들이 전승 1세대의 삶을 찾아다닌다니 좋군요. 기존에 공개된 자료를 읽고 왔겠죠.
김지희 저는 6개월 동안 해강 선생님과 관련된 자료를 박물관과 도서관에서 모두 보고 왔습니다. 더욱 구체적인 내용을 듣기위해 이렇게 직접 관장님을 찾아뵙게 된 것입니다. 해강 선생님께서는 한 평생 청자만을 재현하셨는데 시작하신 동기를 들으신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유광렬 아버님은 보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10년 창경궁으로 소풍을 가서 박물관에 전시된 고려청자를 처음 보시고 ‘신이 나에게 갈 길을 안내했다’고 술회하셨죠. 내 손, 내 기술로 고려청자를 재현하겠다는 결심으로 평생 작업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제가 보기에는 숙명으로 받아들이신 것 같아요.
김지희 기존의 글에서는 1950년대 이후, 50대 중반부터 60대까지 가장 왕성한 작업을 하셔서 ‘절정기’로 표현되고 있는데, 당시에는 주로 어디에서 작업을 하셨습니까?
유광렬 1950년경에는 과거 일본인이 설치해 놓았던 마포형무소 요장에서 죄수들을 상대로 도자기 제작을 가르쳤어요. 지금의 직업훈련소 같은 곳이죠.
홍미자 지금 미술관에 소장된 1950년대 작품은 당시에 제작하신 작품인가요?
유광렬 그것은 1956년 윤효중 선생이 일명 ‘대방동 가마’를 운영할 때 작업하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작업을 하시다가 가마가 문을 닫자 모두 이천 수광리로 내려왔어요.
김주혜 도자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해강 선생님의 1950년대 작품활동에 많은 관심을 느낍니다. 당시의 작품들은 주로 어떤 방법으로 유통하셨습니까?
유광렬 윤효중 선생이 경영을 했을 때라 거기서 만든 것은 우리 아버님에 의하면 어느 백화점의 테일러상이란 곳에서 주로 판매가 되었다고 들었어요.
김지희 해강 선생님은 자서전인 『고려청자』에서 한 달에 40~50개를 만들어 30~40개는 팔고, 나머지는 세계 12개국 외국 박람회에 출품하여 고려청자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고 하셨던데…
유광렬 그래요. 그땐 가마가 없어서 윤효중 선생 가마와 밀양 한국도자기 가마에서 주로 작업을 하셨어요. 그 당시 서울 종로에 신신백화점과 화신백화점 밖에 없어 그곳에 위탁판매를 했죠. 작품은 한국 전쟁에 참전한 미군들이 돌아갈 때 기념품으로 사가곤 했는데 그때 몇 개나 팔렸겠어요.
김지희 1954년에 전국국산품전시회(문교부장관상), 55년 해방10주년기념박람회(최우수상) 56년 미국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시 국제박람회(금메달) 등에 출품하여 수상을 하셨는데, 어떻게 작품들을 출품하시게 된 것입니까?
유광렬 오늘날의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의 전신 같은 곳에서 ‘어디에 출품을 하라’고 연락이 왔어요.
김지희 청자 재현을 위한 실험을 거듭했던 1926년 이후, 일명 ‘영등포 시절’을 거쳐 1928년 일본 별부박람회別付博覽會에서 금메달까지 따신 기록이 있습니다. 그때 출품작과 관련 자료에 대해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유광렬 별부박람회 때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 청자상감포도문주전자, 청자투각목단항아리를 출품하셨고, 일본 IT박람회, 오사카박람회 등 세계적인 큰 규모의 박람회에도 작품을 출품하셨어요. 그리고 우리나라 경복궁에서 1956년 해방 10주년 기념박람회에도 작품을 내셨죠.
홍미자 1950년대 당시에는 흙과 유약을 어떻게 공급하셨습니까?
유광렬 말도 못하게 고생했어요. 지금은 볼밀이 얼마나 좋아요. 대리석이든 석회석이든 규석이든… 모두 몇 시간만 갈면 되지만, 그때는 재료를 갈 방법이 없었어요. 서울 영등포에 가서 대리석을 자르는 공장에서 대리석 자투리를 사과 상자에 담아 이천까지 옮겼으니. 그걸 메고 영등포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을지로 6가로 갔다 이천으로 왔지요. 그 대리석 자투리를 쇠절구에 빻고 채로 거르니 양이 얼마나 나오겠어요. 그걸 유약으로 만들려고 규석 등과 섞어 맷돌에 갈아서 사용했죠. 그 당시 흙은 망우리 흙을 사용했어요.
정경선 망우리 흙은 옹기 흙이 아닙니까?
유광렬 아니죠. 망우리 흙은 도석입니다. 난 도석이 없으면 우리 아버님이 청자를 못 만드는 줄 알았어요. 시멘트 봉투에 흙을 담아 을지로 6가에서 천호동으로 가서 시외버스를 타고 이천까지 다녔어요. 그때는 버스가 앞에는 여자 차장이 뒤에는 남자 조수가 있던 시절이예요. 그 사람 많은 버스에서 사람들이 밟는 바람에 봉투가 터지면 얼른 손으로 모아 담고, 남자 조수는 빨리 내리라고 발로 밀고 여간 고생한 게 아니었어요. 그 흙도 점점 캘 수가 없었는데, 6.25사변 이후 군인들이 토치카 개발을 하는 곳이라 흙을 캘 수 없었어요.
김주혜 언제부터 재료 공급이 원활해졌습니까?
유광렬 1970년대나 와서죠. 64년과 65년 전후에 옹기 굽던 사람들은 옹기업종이 사양길에 들면서 분청자기로 대·중·소 꽃병을 만들어 서울 광장동 꽃시장에 내다 팔았죠. 그때 우선 먹고 살기 어려워 분청에 내가 조각을 했어요.
김주혜 『고려청자』에 따르면 1966년과 67년경에 관장님과 더불어 ‘해강고려청자연구소’를 설립하셨는데, 지금의 ‘해강도자미술관’의 모태라 볼 수 있는지요? 아니면, 다른 취지와 성격의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유광렬 모태는 아니고 가마를 그곳에 놓았어요. 1961년도에 난 생각도 없었는데 아버님이 날 불러 작업을 하라고 하기에 시작하게 된 거죠. 그때 수광리 칠기가마에서 2, 3번 구웠는데 잘 나왔어요. 그 물건은 시대백화점에 매장을 내어 판매를 했는데, 65년 전에는 많이 안 팔려 생활이 어려웠지만, 65년에 한·일국교정상화가 되면서 판로가 열려 나아지기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일본인들이 우리 도자기에 미쳐있었으니까요.
김지희 해강 선생님이 1990년 8월 27일 한 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금까지의 작업이 마음에 드시냐”는 질문에 ‘헛고생 했지’라고 대답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강 선생님도 스스로 만족하신 청자 작품이 있었는지요? 또한 관장님의 생각으로 고려청자에 버금가는 해강 선생님의 작품은 어느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라 생각하십니까?
유광렬 아버님은 평생 만족하지 못하셨어요. 아버님 말씀으로 1910년부터 시작해서 10년 후 쯤에 청자 비슷한 것이 됐다고 했는데, 직접 보지는 못해서 난 모르겠어요. 만족하셨을까요? 60년대 선씨 성의 사람과 동업할 때 등요에서 나온 작품의 색이 아주 좋았어요. 그때 일본인이 서울 종로 시대백화점에서 그 물건을 사 갖고 출국하다가 공항의 문화재관리국 감정관에게 걸렸어요. 몇 억이 되는 고려청자를 가지고 나간다고… 그때 우린 몇 천원, 몇 만원 받았나? 그래서 경복궁 안에 있던 문화재관리국에 아버님하고 들어가 해명한 일화가 있어요. 그때는 해강이란 낙관도 없었고, “어떻게 하면 청자를 재현하는가”에만 전념할 때라… 문화재감정관이 유물(고려청자)과 분별을 못했으니 60년대 이미 재현되지 않았나 싶어요. 갑발도 없이 등요에 구운 매병이었는데..
최선일 1973년 서울 명동 신세계백화점에서 하신 개인전 팜플렛을 보았는데, 사진이지만 유색이 무척 맑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낙관을 사용하셨습니까?
유광렬 1955년 동그란 스탬프 찍는 형식으로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비행기로 수출한다고 하여 비행기 모양과 MADE IN KOREA라고 쓰고, 그 밑에 Lyu Keun Hyung이라고 그렸어요. 얼마나 순수하면서도 우스워요. 허허허. 수출용이라고 비행기를 그리시니까. 그리고 70년대 상표등록을 했어요. 「해강」, 「해강고려청자연구소」라고 30년간 2번 바꿨어요.
최선일 고 혜곡 최순우 관장님과 친하셨습니까?
유광렬 그분과는 1955년 후반부터 친분이 있었죠. 그때 그 분이 ‘성북동 가마’를 재현하셨는데 문화계에서 많은 관심을 기울였어요. 록펠러 재단에서 자금 지원을 받아서 진행하다 자금 지원이 끊기는 바람에 거기서 중단되고 말았어요. 우리나라에 6.25사변 이후 2개의 가마가 있었는데 ‘성북동 가마’와 ‘대방동 가마’입니다.
홍미자 1993년 1월 20일 백세로 타계하시면서 92년 10월까지 직접 작업을 하셨다는데, 생전의 모습은 어떠셨는지요?
유광렬 눈도 잘 보이고 손 떨림도 없고 건강하셨어요. 돌아가시기 3개월 전까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아침진지 드시고, 작업장에 나오셔서 2~3시간 조각하시고, 점심 식사 후엔 낮잠 한숨 주무시고, 또 작업장에 나와 둘러보셨죠. 우리 집안 동서가 같이 작업을 할 때, 어느 날은 작업 중에 물건을 깨뜨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깨뜨렸으니까 물어내세요” 그랬더니 아버님이 “난 이가 없어서 못 물어낸다”고 하셨대요. 아주 유머가 보통이 아니셨죠. 그리고 내가 용돈을 좀 드리면 “내가 물레 대장보다 기술이 못하냐? 왜 내가 월급이 적으냐? 내가 그만 못하냐?” 하시며 웃으셨죠. 용돈을 드리면 모아 두셨다가 신문에서 안타까운 학생이나 사람의 기사가 나오면 서울에 올라 가셔서 손수 어려운 학생과 사람들을 만나 돈을 전해주고 오시곤 했어요.
곽선옥 해강 선생님이 작품을 하시면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까?
유광렬 항상 정신이죠.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집중해야지. 엉터리(대충)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죠. 작품에는 늘 철저하셨어요.
김지희 1990년대 이전에 고집해 온 전통적인 매병 문양과 달리, 92년도 백수기념회 작품에서는 자유로움과 추상성을 함께 작품에 반영하셨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의미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면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유광렬 어떤 변화를 가지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전부터 그런 작업을 하셨는데, 6.25사변 때 내 나이 9살이었죠. 그땐 모두들 어려운 생활이라 모두 팔려 지금 남은 작품이 없어요. 오래 전부터 그런 작업을 자연스럽게 해 오셨어요. 어떨 땐 눈을 반쯤 감으시고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작업하기도 하셨어요.
최선일 유물은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모으셨습니까?
유광렬 1960년 중반에 서울 소공동 반도아케이드에서 거래도 하고, 평소에 알고 지내던 김양수씨에게서 고려청자 대접 2점을 선물로 받게 되면서 수집하게 되었어요. 이사 오기 전 안동네(해강도자미술관에서 1㎞내외) 살 때죠.
김지희 1980년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고려청자 고유의 비취색이 나왔다고 일컬어집니다. 관장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또한 80년대 비취색의 대중화를 이룬 것이 가스 가마를 이용한 번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영향도 있습니까?
유광렬 우리도 주로 가스 가마를 써요. 도자기 공부하는데 청자가 가장 어려워요. 1970년대 이전에는 등요 밖에 없었죠. 성공률이 2~3% 내외입니다. 가스 가마는 H대학의 한 교수님이 경기도 장흥에서 제일 먼저 사용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80년대 가스 가마의 보급은 도자기의 대중화를 불러일으켰는데, 실패율이 적고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려시대 청자도 완벽하게 환원된 비색청자는 천 개 중에 하나 나왔을까요? 대부분 한 쪽은 산화되고 한 쪽은 환원되죠, 전남 해남에서 만들어진 녹청자는 100%가 산화 청자에요.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어려운 작업이 청자 만드는 거예요. 손도 많이 가고 작업 과정도 제일 어려워요.
최선일 1970년경에 화목 가마는 얼마나 자주 번조하셨어요?
유광렬 한 달에 한번 씩은 땠어요.
최선일 우기雨期 때 영향을 받지 않습니까?
유광렬 우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곽선옥 가업家業을 계승하시면서 후회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유광렬 처음 안동네 살 때, 어느 해가 질 무렵 술 한 잔하고 터덜터덜 걸어오면서 “만들기도 어렵고, 사가는 사람도 없는 이 청자를 나한테까지 만들라 하다니”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어요. 아버님은 그만큼 가정생활에 제일 중요한 것도 신경을 안 쓰셨어요. 청자 재현에만 신경을 쓰시고. 밀양에 가시면 6개월씩 오지도 않고, 내가 가족을 부양했으니 어려운 시절이었죠.
유광렬 1970년대에는 K대학에 계시는 한 교수님이 타일을 주문한 적이 있어요. 학 한 마리를 상감 처리한 타일이죠. 틀을 만들어 작업을 했는데, 그걸 등요에 구우니 몇 판이나 들어가겠어요? 지금은 상판이 얇고 작업하기 얼마나 좋아요. 그때 빚을 얻어 (책상의 두께를 가리키며) 이두께보다 두꺼운 상판을 손수 만들어 작업을 하니 위의 타일은 위로 휘고, 밑의 상판은 밑으로 휘고 해서 몇 판 만들 수가 없었죠. 납기일을 맞출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그 교수님은 쓴다고 사 갔어요.
최선일 그 작품은 어딘가에 있겠네요?
유광렬 지금 세운상가에 있는 풍전호텔에 있어요. 몇 년 전에 가보니 건물 외부 엘리베이터 입구에 누렇게 산화가 되어 황청자가 되어 있더군요. 세상에… 난 거기만 가면 부끄럽고 창피해요. 그때는 그 이상 만들 수가 없었어요. 기술보다 여건이 어렵고 흙도 그렇고. 그때 당시 7만5천원 빚을 갚느라고 아주 애 먹었어요.
최선일 그래도 이제는 아주 귀한 자료가 되겠어요.
유광렬 만약 건물이 헐리게 되면, 그대로 뜯어와 보존시켜야죠. 요즘은 작업 여건이 얼마나 좋아요. 그때는 인건비도 없어서 나 혼자 작업을 했어요. 초벌하고 시유하고 뜨거울 때 빨리 구워내야 하니까 땀을 어찌나 흘렸는지. 물 한 동이에 소금 한 국자를 넣어 소금물을 마셔가며 혼자 해 냈죠. 가마에 불을 붙이고 힘들고 피곤함에 깜박 졸아서 불을 꺼뜨렸어요. 어떻게 했겠어요? 재작업을 했죠. 다시 한 것이 바로 그 꼴이 예요.
곽선옥 우리나라에서 1970년대 일반인과 문화계에서 전통도자에 대한 인식은 어느 정도였나요?
유광렬 천대 받았어요. 전통도자는 좋게 말하면 재현이네, 모조네, 모조네 해서 천대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당시 도공들은 먹고 살기 위해 자생했을 뿐이죠.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가 되면서 외국(주로 일본)으로 수출할 때는「모조품제조신청서」(“나는 청자상감매병을 몇 개 제작하겠다. 국보 지정문화재를 몇 개 제작하겠다.” 등)를 작성해서 완료 보고서를 제출하면 문화재보호협회에서 인지를 붙여서 수출하게 했어요.
최선일 아! 그걸 봤어요. 유물에 왜 인지가 붙었나 궁금했는데, 그런 이유로 붙어있는 것이군요.
유광렬 1970년 초까지 전라도에 나씨 성의 오랜 도공들이 있었고, 막사발과 백자사발을 만들었는데, 장날 한 짐을 지고 나가 팔아도 좁쌀 한 말이 안 되었어요. 그게 우리 도공들의 현실이었죠. 도자기는 우리 문화의 큰 부분인데…
김지희 2000년 11월 27일자 경향신문에서 다니준세이谷俊成, 70세라는 일본인이 해강 선생님의 청자를 자신이 만든 청자라고 속여 10여년 동안 사기행각을 벌였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이로 인해 전 세계 학계에서 해강 선생님의 청자야말로 고려청자와 다를 바 없는 최고의 작품이라고 인정하는 또 한 번의 계기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당시 상황은 어떤 것인지 알려주세요?
유광렬 “인생거덜의 댓가. 외무성도 속은「고려청자 복원」사기 도예가”란 제목으로 고려청자 복원위조 소동”이 일어났어요. 원래 거짓말을 했던 당사자가 신문에서 스스로의 업적을 자랑스럽게 발표한 일로부터 발각되었기 때문에 치졸하기 짝이 없었죠. 게다가 외무성은 이런 사기꾼을 표창까지 했다니 기겁할 일이었어요. 2000년 4월 4일 일본경제신문 조간 문화면에 〈고려청자 환상의 기술〉이란 제목의 글이 개재되었는데 내용은 “1965년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고려청자 복원을 착수하게 되고 고생한 결과 80년 중반 복원에 성공한 것으로 85년경부터는 복원된 고려청자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디자인으로 다양한 도자기를 제작하게 되었음을 주장하고 프랑스에서 개인전도 열고 이태리, 모나코 등의 전람회에도 출품했다. 그리고 99년에는 미국 대학으로부터 공학박사학위와 예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의 이토伊藤관장은 “이런 기막힌(웃지 못 할 코미디 같은)기사는 없다”고 했대요.
다니준세이는 “다니통상”이란 회사를 경영하며, 한국에서 도자기를 구입해서 일본에 팔아넘기는 소위 중간 상인에 불과한 인물이죠. 그해 4월 일본에 친분이 있는 교수가 이 기사를 보고 놀라 내게 보내와 사실이 아님을 밝히고 말이 안되는 기사임을 일본경제신문에 항의를 했어요. 11월 26일 급히 방한하여 이천에서 사죄회견을 열고 모든 것이 거짓말임을 인정하고 “사죄하고 간다”는 말만 연발할 뿐 어떤 반론조차 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바로 11월 27일 일본 동경신문 1면에 이러한 사실이 크게 보도되어 세상에 알려진 것이죠. 같은 날 일본경제신문도 사과문을 개재했어요.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에게 교토시, 국교교류기금, 나아가 외무성까지 모두 완전히 속았기 때문이죠.
김지희 아주 놀랍고도 이해가 안 되는 사기극이었네요. 해강 선생님은 고려청자(전승도예) 재현에 일생을 바침으로써 고려시대 이후 끊겼던 한국도예계의 맥을 이어주신 분이십니다. 오늘날 전승도예와 현대도예의 ‘조화’라는 과제 앞에 해강 선생님의 유업을 저희 같은 후학들이 어떤 자세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유광렬 전승도예는 어려워요. 어렵지만 천년이 되는 우리 전승도자를 모르고 뿌리를 내릴 수 없어요. 우리의 것을 철저히 알고 현대도자를 새로이 창조해 나가는 자세로 열심히 연구해 주길 바래요.
최선일 그동안의 해강 선생님이 신문이나 방송에 인터뷰해 주신 자료를 모두 보관하고 계신지요?
유광렬 그럼. 모두 갖고 있죠.
유광렬 1975년 RKB라고 후쿠오카에서 <해강과 그 일족>이란 내용의 특집프로 방영 내용도 그해 8월 15일에 보내오고, 그 전 60년대 중반쯤 KBS 방송국에서 만든 ‘의지의 한국인’이란 프로의 필름도 있어요. 그리고 모 라디오 방송국에선 ‘해강의 일대기’란 제목의 일일방송도 몇 주간 나왔어요. 그런 자료가 모두 미술관에는 있어요.
최선일 그런 자료가 있었군요. 저희는 6개월간 찾아도 도대체 무슨 자료가 있는지 찾지 못했습니다.
유광렬 그런 기타 자료를 보면, 별별 일이 다 많아요. 나뿐만 아니라 6.25사변 이후 모두들 고생을 많이 했지만 난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요. 그런 고생을 했기에 지금의 해강도자미술관이 있지 않나 싶어요.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디딤돌의 장을 마련해주고 싶어 귀중한 파편과 많은 유물을 수집했죠. 유물을 통해 제작 과정과 기술력을 배우고 문제점을 발견해 새로이 전수하며 후회 없는 운영 관리를 해왔는데 지금은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워졌어요. 보다 큰 미래의 청사진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말이죠…
최선일 그래서 해강도자미술관이 모태가 되어 강진청자박물관과 조선관요박물관도 탄생되었습니다. 모두 관장님과 정양모 선생님, 최건 선생님 등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김지희 지금까지 해강 선생님의 얘기를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실기하는 사람이지만 6개월 동안 도서관과 박물관을 다니면서 밝힐 수 없었던 과정을 듣다보니 조금씩 이해가 됩니다. 저희 후학들이 최대한 노력해서 1세대의 긍지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현대 도자에 접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희 후학들에게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은 없으신지요?
유광렬 어려운 시기입니다. 정상에 오르면 내리막이 있듯이 다시 정상을 향해 오르려는 사람이 되기를 바래요. 그때를 대비해서 도약의 토대로 지금은 열심히 공부하고 철저히 연구하세요. 여러분의 어깨에 나의 미래까지 짊어지고 간다는 사명으로 오늘 모인 후학들이 우리 도예 전승 1세대들의 몫까지 해 주길 바랍니다.
김지희 관장님 오랜 시간 귀중한 자료 많이 보고 듣고 갑니다.
유광렬 해강도자미술관의 모든 자료는 여러분을 위해 개방되어 있으니 게을리하지 말고 언제든지 철저히 연구하러 오세요. 그것이 나의 보람입니다. 참 얼마 전에 『해강 유근형 비망록』이 출판되었는데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겠네요. 한권씩 선물로 드리죠.
김지희 관장님의 따뜻한 격려와 사랑을 느끼며 돌아갑니다. 해강도자미술관의 영원한 발전이 계속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대담 사회·발췌자 : 김지희
동덕여자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단국대학교 디자인대학원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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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erazin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