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이 아닌 흙으로 그린다는 것
글 홍성희 _ (재)세계도자기엑스포 도자연구팀 출판사업 및 도자연구 담당
경제 불황의 그늘이 짙게 드리운 지 오래인데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많은 전시가 우리의 눈과 감성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그러나 그 수많은 이미지가 난무하는 어지러운 이 세상에서 수많은 세월의 흔적을 기억하는 원초적인 재료-흙으로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작가들은 몇이나 될까? 또 흙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대중들에게 얼마나 호소력 있는 것일까?
10년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새로운 미디어가 예술에 개입함으로서 과거에 비해 예술의 영역은 놀라우리만치 광활해졌다. 미디어와 과학의 발달은 이제 개입 정도를 벗어나 지배의 주체로서 군림하는 느낌마저 지울 수 없다. 이런 분위기는 작가들은 자신의 자유창작의지를 더욱 강화하고 기술과 재료의 발달은 작가에게 기술적 제약으로부터 해방을 선사했다.
도예가들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타분야와의 접목을 통해 표현영역의 확장을 이루어내려는 분위기가 생겨나고 있다. 도예 혹은 흙 본래의 미감을 찾는 것보다 점차 도예가 순수미술화 되어가는 이러한 분위기는 일 쓰임이 목표인 공예를 마치 구시대의 유산으로 치부하거나 도자조각 중에도 첨단기술에 호응하지 않는 작품들은 시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공예로서의 도예와 예술로서의 도예를 만드는 작가는 그들의 특성상 예술가와 공예가로 분리하기 힘들다는 현실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이제 공예로서의 도예와 예술로서의 도예를 분리하는 끊임없는 움직임은 시대적 조류인 것 같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근본적으로 예술장르의 구분은 이론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작가들과는 무관하다.
이 세상 새로운 사조를 위해 작업하는 작가가 대체 어디 있겠는가? 이러한 측면에서 현대도예를 개별 작품군으로 무 잘라내듯 정확히 구분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한 일이다. 현대도예가 현대미술로의 영역확장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한 현대도예를 해석하는 다양한 기준과 해석방법이 동원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 중에서 현대미술에서 사용되고 있는 다양한 방법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우리 현대도예를 판단하고 결정짓기에 앞서 현대도예는 질료-흙과 무관할 수 없는 불의 예술이며, 본디 현대도예가 속한 공예의 아우라를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많은 현대 도예가들과 애호가들이 2001년 피터 불코스Peter Voulkos의 사망으로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영화榮華는 종식되었으며 1970년대 이후 시작된 ‘용기로의 회귀’가 완전히 고착화 되어가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 예로 미국에서 열렸던 지난 SOFA와 NCECA행사, 각종 도자관련 국제공모전의 출품작 경향이 점점 용기의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이 그리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공예와 순수예술은 하나며 그것은 단지 아주 작은 차이일 뿐 훌륭한 공예품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공예품이 바로 훌륭한 예술품이기 때문이다. 타 장르의 해석방법들을 끌어들이기 전에 예술매체로서의 현대도예는 순수예술 즉, 회화와 비공예적 조형과 뚜렷이 구분되는 특유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현대도예는 현대예술의 주요 주제인 사랑, 격노, 위트 등 인간의 원초적인 오감을 극히 자연적인 수단-흙, 물, 불을 통해 자유롭게 표현되는 매체이다. 결국 도예를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이자 장애는 사조나 경향이 아니라 바로 흙, 물, 불 그 자체다. 또한 도예가들에게 가장 큰 스승이자 영감의 원천도 변함없이 흙에서 비롯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950년대 피터 불커스Peter Voulkos를 비롯한 오티스Otis 그룹에 의해 형성된 추상표현주의의 열광이 그 모태인 현대도예는 모더니즘과 탈모더니즘, 로칼리즘과 하이브리디즘, 지금의 포스트모던에 이르기까지 넘쳐나는 사조들의 변증법적 혼재를 거듭하면서도 끊임없는 발전과 변모를 계속해왔다. 그러나 탈피脫皮하고 반목反目하는 사조들 속에서 현대에 흙을 화두로 작업하는 많은 도예가들이 흙, 물, 불로 각 문화권의 자연, 철학, 역사, 전통을 그대로 담아내는 동일한 작업론을 가지고 있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물론 흙이라는 공동매체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 도예인들을 하나로 규정지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과거 도공들과 달리 현대 도예가들은 흙이라는 재료 그 자체보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에 더욱 천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문화와 다른 시대를 통해 각자 다른 이념과 자아정체성을 표현한다. 결국 현대도예의 가장 화끈한 화두는 남과 뚜렷이 구분되는 예민한 예술가들의 영혼, 바로 자신인 셈이다.
최근 들어 많은 작가들의 도자를 바라보는 눈이 예전과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단순한 기술적 발전이나 문제점에 관한 물음은 이제 더 이상 도예가들의 관심을 끌 수 없다. 도예가라면 제조과정에서 마땅히 겪어야 할 흙과 유약, 가마와 사투를 벗어나 이제 도예가들은 기술의 속박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조금의 갈라짐이나 의도하지 못한 유약의 발색들은 또 다른 기술의 도움으로 극복해 낼 수 있게 되었다. 80~90년대 중반까지 미국과 일본을 선두로 세계의 현대도예의 주요 관심사는 재료의 본질과 한계를 어떻게 눈앞에 실현하고 뛰어넘을 것인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0년대 이후 다양한 전공과 이력을 가진 예술가들이 도예계안으로 유입되고 기존 도예가들의 흙 이외의 것에서 돌파구를 모색하면서부터 재료자체의 탐구보다는 작가자신의 자아와 그를 둘러싼 환경이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흙이란 무엇인가?”, “도예와 순수예술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과거 장르와 소재에 집착하던 모더니즘 시대의 물음은 자취를 감췄다. 모더니즘 특유의 ‘예술 그 자체를 위한 예술’- 절대 진리 혹은 유일선 추구는 사라지고 80년대부터 시작된 특유의 불확실하고 불완전하고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함을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는 모든 창작적 시도를 가능케 했다. 이제 현대 도예가들은 재료의 물성에만 집착하지 않고 문화, 전통, 자아정체성, 타장르, 사회간의 이동과 이슈 등으로 경계와 관습을 넘어 정보를 포식하며 새로운 결과물들을 토해낸다. 기술의 문제가 해결될수록 중요해 지는 것은 작품의 내용이다. 도예가 좀더 기술적인 제약에 대한 토의를 던져버리고 지적이며 순수한 순수예술의 영역으로 자꾸만 진입할수록 도예라는 예술영역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아름다움과 타 장르와의 분별력이 더욱 중요해 지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영역이 모호해지고 경계가 허물어질수록 경쟁상대는 늘어나고 경쟁은 더욱 심화된다. 결국 타 장르에 속해 있던 작가들과 구분되고 주목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료의 특성과 과정상의 특질을 더욱 강조할 수밖에 없다. 다만 예전처럼 흙에만 집중하여 작업하기보단 도예의 본질적인 개념들에 집중한다는 것이 다르다. 불을 이용한 소성의 의미, 흙이 시간에 따라 마르고 갈라지는 일련의 과정에 대한 고찰 등 예전보다 도예의 의미는 확장하고 심오해졌다.
1950년대와 1960년대처럼 전지전능한 조형재료로서 흙이 추앙받던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중한 탐구와 대상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실험을 거듭하는 작가들은 그 국적과 성별에 상관없이 앞으로도 많은 이미지들을 많은 이미지들을 쏟아낼 것이 분명하다.
여러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이미지를 보는 일은 항상 흥분되는 일이다. 아무리 문화와 인종, 살아온 시대가 다를지언정, 인간으로서 사는 보편적인 방법을 공유하고 있는 도예가들이 같은 주제라도 다른 이미지와 견해를 쏟아내는 것은 어쩌면 신기에 가까운 일이다. 여러 작가들을 만나고 보고 듣고 하는 과정 속에서 나는 국적과 인종에 상관없이 그들이 동일한 목표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들이 가는 일은 인간의 삶에 대한 다방면적인 성찰이며 종단 취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그 자체다. 그러한 면에서 작가란 이미지로 수행하는 자이며 철학하는 자이다. 그들의 작품에는 그들의 삶, 그들의 인격 나아가 인간이 삶을 살아내는 오만가지 관점과 방법이 담겨 있다. 작가의 취향과 시대의 미감 즉, 개인적인 것에서부터 사회적인 것에까지 그 안에 담겨 있다.
나는 담는다는 행위에서부터 도예가들을 바라본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것이 그릇의 형태이든 그렇지 않던 간에 도예작업이란 안을 비워내는 행위다. 흙벽을 사이로 내가 속한 공간과 내가 속하지 않은 공간을 분리해내는 일이다. 그 속하지 않은 공간에 자신의 이상과 삶을 그대로 담는 셈이다. 나를 담고 세상을 담아내는 자들, 그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는 자들은 여전히 적절한 대우와 평가에서 멀리 떨어져 서 있다. 모든 예술가들이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예술 시장에서 거래가 주로 되는 품목은 회화나 조각이다. 흙으로 작업하는 작가들은 예술 주거래 시장에서 저만큼 물러나 있다. 생계를 위해 그릇을 만들거나 문화센터나 학교에 강의를 나가거나 그도 아니면 노동판이나 남의 도방에서 남의 일을 해주며 다시 작업할 날을 기다려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흙을 놓지 않고 놓아도 다시금 돌아올 수밖에 없음은 어쩌면 흙을 만지는 자의 숙명과도 같은 것일 게다.
흙이 좋아 흙을 만지는 그들은 모두 어려운 경제적 형편과 긍정적인지 않은 작업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작업장에서 자신의 내면을 탐닉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흙으로 삶을 진중히 그려나가는 이들에게 어서 빨리 진정 도움이 되는 지원과 정책, 전문가들이 활성화되어 온몸으로 투쟁하듯 삶을 그려내는 도예가들에게 힘이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1 「분장항아리」 이강효 작, 적점토·분장 28×28×25, 2005
2 「화기」 이기조 작, 백자토·판성형 26·23×26, 2004
3 「동상이몽」 심지수 작, 2000
4 「Teastack」 Don Reits 작, 101×61×61 Stoneware, Woodfire
5 「Untitled Teapot」 Paul Dresang 작, 25×25×15 Porcelain, Woodfire
6 「Flotex Tampon Holder」 Kathy King 작, 12×5.5×4, 1998
필자약력
홍익대학교 도예과 동 대학원 졸업
전, 홍익대학교 도예연구소 연구원
현, 세계도자기엑스포 도자연구팀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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