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한국도예계를 돌아본다
2005년 한국 도예교육
글 김영민 _ 아트컨설턴트
북상중인 입학자원 부족
도예과(혹은 유사학과)의 입학정원이 부족하다는 말을 허다하게 들었고, 정확하게 어디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 부족이 서서히 수도권으로 북상중이라는 말도 허다한 말들에 연이어 들린다. 그 북상은 지방학생의 대거 수도권 편입이나 2년제 대학이 4년제 대학으로 오는 관문쯤으로 생각하는 현상들과 대학원 진학들로 이어지면서, 더욱 지방학교의 입학자원의 부족을 가속화한다.
원인은 몇 가지 안 된다. 첫째는 가서 죽더라도 서울에서 학교를 다녀야겠다는 신념과 그 신념을 뒷받침하는 사회적 통념이며, 두 번째는 지방의 학교들 (첫 번째 원인 때문에 서울의 학교들이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의 커리큘럼이 사회적인 경쟁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며, 세 번째는 도예라는 것이 현대사회에서 일정부분 경쟁력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원인 중에 최소한 두 가지는 사실관계를 구성하고 있으며, 이것에 대한 고민들과 개선의 의지들이 대학도예교육의 당면과제이다. 하여튼 학교는 너무 많고, 학생은 감소하고 있으며, 교육은 생존을 모색하긴 하나 만만치 않아 보인다.
바뀌는 이름들
이제 도예학과라거나 도예과라는 이름을 가진 학과는 몇 되지 않는다. 몇 년 전 부터 디자인이라는 말이 도예나 요업 뒤에 붙더니, 그 다음엔 조형이라는 이름이 붙고, 이어서 올해부터는 좀 더 다양한 형태, 가령 문화 같은 것이 붙어 도자나 도예라는 말을 설명하거나 논의자체를 달리하려 하고 있다. 무언가 교육방법과 지향점을 달리하려는 노력들로 보이는 이러한 현상이 어느새 전국적인 경향이 되었다. 혹은 유리와 도예를 같은 범주 하에서 다루려는 장르통합적인 양상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당장 효과를 나타내진 못한다. 아직은 입학자원의 확보를 위한 일종의 자구책정도로만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개명의 전국화는 어떤 면에서도 긍정적이다. 말을 바꾸면 그 존재의미도 변하게 된다. 예술지향의 혹은 공예지향의 이원적인 방식에서 좀 더 다양한 ‘무엇’을 담보하려는 노력이며 탈장르적 가능성을 ‘개명’ 자체가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실행이다. 커리큘럼이 바뀌고, 문화전반에서 자양분을 공급받아 새로운 논의와 창작을 형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적구성원의 변화는 더디기만 하다. 그러나 모든 일이 한꺼번에 혁신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름이 바뀌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곧 인적구성원의 변화를 추동할 것이다. 교육이라는 말은 ‘보수주의’를 근저에 깔고 있다. 그래서 더 느릴 수밖에 없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학생들
술자리가 아니면 좀 꺼려지는 이야기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더 이상 학생들이 도예가가 되기를 희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선, 도예과를 지망하는 많은 학생들이 입학부터, 혹은 입학한 후에도 도예가를 전망으로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대부분의 경우, 디자인을 지망하려다 포기하거나 일부대학은 입시과목이 같은 회화과를 지망하려다 포기하고 도예과를 지망한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는 도예가로 살아가는 것의 여러 가지 고달픔이나 예술로의 지향이 주는 무게 때문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 일부는 취미처럼 반만 학생인 경우도 있다. 이러한 학생이 과반수가 넘어가면 그 과의 분위기는 ‘안하는’ 쪽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고, 학과는 방향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현상이 심화되면 학생의 전반적인 질적 저하를 막을 수 없으며, 학원은 일종의 아마추어리즘 혹은 사회재교육기관의 성격으로 전락한다. 대중의 대학에서 더 이상의 엘리트교육은 요원해지는 것이다.
엘리트교육이 없어진 곳에서 존재하는 대학은 다소 허망하다. 그렇게 되면, 이끌어가는 자를 배출하지 못하는 대중과 일반의 대학이 된다. 대학이 제대로 된 교육의 질을 담보하지 못하는 데에는 학생들의 책임도 매우 크다. 80년대식 열정이 그리운 까닭이다.
학력 인플레이션
대학원과정과 박사과정이 거의 아무런 준비도 없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사람이 뽑히고, 졸업생을 만든다. 이러한 대학원의 양적팽창과 학력 인플레이션은 두 가지 면에서 궁핍을 가져온다. 우선, 교육의 시간을 연장함으로써 교육투자비용을 증가시키게 되어 개인의 재정적 궁핍을 가져오고, 두 번째는 양적팽창으로 인한 교육의 질의 저하를 통한 도예문화적인 궁핍을 동반하게 된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만, 더 많은 성과물을 얻을 수 없게 되고, 단지 대학원 이상의 상급교육이 일종의 필수적이고, 혹은 암암리에 강요되는 방식의 당연히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로 변화하게 된다. 대학원은 이제 대학정도의 수준이 되어가고, 박사과정은 여러모로 필요한 사회적인 장치가 되어버렸다. 고백하자면 나도 그에 해당한다. 대학원을 졸업하지 않은 작가는 점점 희소해지고, 눈을 돌리면 둘 중의 하나는 박사이거나 박사과정 재학생이다. 울며 먹는 겨자지만, 그 인플레이션을 감당해야하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몫이다. 그래서 공공연히 돈 없으면 그만하라는 이야기가 회자된다. 학력이라는 것이 점점 계급을 강화하고 공고하게 한다.
과잉공급
근본적으로 문제는 공급의 과잉이다. 유지해야 하는 하나의 시스템에 비해서 공급이 너무 많다. 도예계를 유지하고 그 문화를 전개하는데, 이렇게 많은 인적구성원을 배출하지 않아도 되며, 혹은 말아야 한다. 근본적으로는 공급을 줄이고 공급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선회해야한다. 문화센터가 아닌 다음에는 대학이 도예의 대중화를 지향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구성원들이 졸업 후에 사회교사로 혹은 작가로 해야 하는 일이다.
공급을 줄이는 일에서 발생하는 딜레마는 학교의 수를 줄이거나 학생의 수를 줄여야 한다는 것에 있다. 지금, 보이지 않는 손이 도예과 정원을 줄이고 있다. 그 손이 북상하고 있는 것이며, 어쩌면 이것은 위기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예측되는 수요 없이, 필요에 비해서 외형을 확대한 것을 바로잡는 일이기도 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교육의 질을 담보하는 쪽의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지향을 찾아온 사람에게 지향에 맞는 교육을 시키는 것이 어떤 의미로든 답일 수밖에 없다. 소수정예는 아니더라도 좀 더 소수의 사람이 좀 더 질 높은 교육을 받고 좀 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모두가 예술가가 될 수 없으며, 일자리도 지금의 인원을 수용하기에는 태부족이다.
나를 포함한 애정 없는 선생들 일부
일종의 고해성사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우리의 대학은 학교가 의료보험을 해주는 선생과 그렇지 않은 선생으로 나눈다.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선생은 안정감 때문에 사회의 변화를 교육에 적용하지 못한다. 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은 그들을 더 불안하게 할 것이므로 그들의 전통적인 방식의 교육을 고수하려 노력한다. 이것도 잘 살펴보면 애정의 결핍에 근거한다. 교육공급자가 교육수요자의 이해와 요구가 아니라 자신들의 합목적성에 근거하여 보수화하는 일은 당장의 계system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지만, 장기적으로는 계의 위기를 초래할 뿐 아니라 수요자는 일종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 의료보험이 되지 않는 선생들은 교직이 준거집단이 아니거나 당장 소속집단이 아니므로 무한한 애정을 가질 수 없다. 생업이 아닌 일은 좀 더 소홀할 수밖에 없고, 의료보험이 되는 선생을 지향하는 이들은 학생보다는 자신의 수업이 보여주는 바, 일종의 실적이 더 중요시된다. 졸업작품전 시즌의 진풍경들은 그런 결과의 산물이다. 이래저래, 선생들은 학생들이 도예에 애정이 없는 만큼 학생들에게 애정을 가지지 못한다. 고백하자면, 가끔 학생이 선생의 볼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나는 그들과 친해 질수는 있어도 도무지 그들을 전문가가 될 사람으로 존중하거나 그들이 나의 동료가 될 것이라는 희망들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전인적 형태의 예술가와 날카로운 감성의 디자이너나 문화기획자가 될 사람들이 잘 발견되지 않는 것이 나 같은 애정 없는 선생들의 책임이긴 하지만, 전적으로 그렇다고 하기엔 좀 억울하다. 아마도 그들 중에 위에서 말한 전문가적 기질이나 소양이 있는 사람이 없진 않을 것이다. 다만 소통의 부재로 내가 알고 있지 못할 뿐이라고 믿고 싶다.
결어 혹은 사족
상황이 이러한 가운데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놀랄 만한 일이다. 그러나 점차로 나아지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듯하다. 우선 학과의 이름과 커리큘럼이 바뀌어가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학생과 선생들이 실질적인 교육의 필요를 느끼고 있으며, 점차 그 필요에 대한 대응속도를 빨리 하고 있다는 것들이 감지된다. 문제는 도예를 지향하는 학생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 교육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전적으로 우리가 도예의 영역이라고 여겼거나, 현대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예술로써의 도예가 닫힌 형식으로는 사회적 실효를 다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필자약력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예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서울산업대 IT대학원 겸임교수, 홍익대, 경희대 강사
한국공예학회 사무국장
아트 & 디자인 d.nomad 아트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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