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수KANG.MIN.SOO/가슴의 언어로 빚어낸 달항아리
글 윤두현 영은미술관 큐레이터
작가 강민수는 조선 백자, 그 중에서도 달항아리의 미적 탁월함을 오롯이 재현해내고자 지난한 연구와 실험을 지속해 온 젊은 도예가다. 이런 그의 네 번째 전시2007. 4.18-4.24 가나아트스페이스에 대한 리뷰를 다급하게 의뢰받은 필자, 그의 작품을 면밀하게 분석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을 가슴에 품고 전시장으로 향했으나, 정작 그곳에서 달항아리를 대면하자 머릿속은 다만 하얗게 비워질 뿐이었다. 결국에는 과연 달항아리의 무엇이 그를, 혹은 우리를 그토록 열광케 하는가? 라는 스스로의 궁금증에 대한 어떤 실마리도 당장은 추궁할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이번 전시를 위해 작가가 그간 걸어온 여정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아무런 사전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이른바 조선 달항아리의 비법을 찾기 위해 거의 홀로 고군분투해야 했다. 또한 그렇기에 각종 사료나 연구논문 등의 자료들을 검토하고, 동시에 조선백자가 있는 박물관을 찾아 발품을 팔면서도 그는 실패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실패가 아니었다. 두 해전 작업장에 장작가마를 새로 짓고 스스로에 맞는 소지와 유약을 찾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쏟은 결과 마치 한줌의 소금과도 같은 언어를 체득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가슴의 언어다. 가슴의 언어란 그의 손끝에 아련하지만 명징하게 어려 있는 몸의 언어이다. 이는 그가 달항아리의 미적 탁월함이 바로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정중동, 즉 인공과 자연의 조화된 미덕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아련하지만 명징하게 체득했음을 뜻한다.
강민수의 달항아리는 일견 여리고 섬세한 중에서도 대범함을 품고 있다. 어쩌면 작품이라는 것이 곧 주인을 닮을 수밖에 없음을 떠올릴 때, 달항아리의 우윳빛 기면에 녹아 있는 그러한 표정들이 곧 작가의 모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이는 늘 쓰는 문자로도 자신의 가슴 안에 담은 뜻을 온 채로 담아내기가 수월치 않은데, 하물며 함축적인 시각언어로써 자신만의 표정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죽하겠는가라는 점에서 결코 가벼운 성과가 아니다. 아울러 이 지점에 이르렀을 때라야 비로소 “있는 것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한다.”라는 철학적 전언은 오롯이 달항아리에 안겨온다. 결국 필자가 그의 달항아리를 처음 대면했을 때 다만 하얗게 비워질 뿐이었던 것도, 그것이 이성의 언어로는 읽혀지기 힘든 가슴의 언어를 담고 있기 때문이리라. 독일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의 이른바 ‘무목적의 목적성purposiveness without a purpose’이라는 미의 규정이 머
리가 아닌 가슴으로 파고드는 이유도 이와 같다.
물론 강민수의 달항아리 작업에 있어서 이미 스스로 밝히고 있는 바처럼 지금까지 걸어온 길보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전시장에 놓여 있는 달항아리들 간의 다소 심한 편차는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감히 덧붙이고 싶은 것은, 작가가 꿈꾸고 있는 조선 달항아리의 오롯한 재현에 있어서 성공의 열쇠는 달항아리의 가시적 형태만을 좇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무형의 정신성에서도 동일하게 모색되었을 때라야 만이 온 채로 얻어질 수 있다. 이는 비단 작가뿐만 아니라 삶과 예술의 정수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앞으로의 삶 자체로서 이끌어 가야할 미완의 화두다. 궁극적으로 예술의 심원함은 결국 삶에 대한 통찰 안에서 연원하는 것이라는 변하지 않는 믿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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