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예술은 미술의 새로운 개념이다
도예 대중화/예술의 대중화
글/김숙경 미술평론가
인류 역사상 오랜 기간 동안 예술가는 없었다. 예술가의 역사는 생각보다 짧다. 그림을 그리든 조각을 하든 공예품을 만들든 그들 모두는 기술자였다. 아무도 예술가라고 부르지 않았다. 주문 생산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등장은 이러한 구조를 완벽하게 무너뜨렸다. 모든 것은 상품화되어 시장 경제에 흡수되었다. 이것은 모든 미술품이 상품화된 것을 뜻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속에 살고 있기에 고부가가치를 누리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되는지 잘 안다. 잘 포장하여 최대의 이윤을 얻는 것이 자본주의의 섭리이다. 예술품 역시 시장경제 안에 있다.
19세기말 등장한 낭만주의는 고전적 규범에 대한 반항에서 시작되어 모든 제약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도덕이나 지적인 가치에서의 해방을 요구하며 자신들만의 울타리를 만들어가게 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구호 속에서 예술가들은 정치나 사회 현실과 동떨어지기 원했고, 자신들만의 이상적인 세계 안에 갇히기 시작한다. 사실 이것은 산업주의와 보조를 같이하며 진행된 분업화의 표현이며, 다른 한편으로 산업화와 기계화된 생활에 먹혀 들어갈 위험에서 자기를 지키려는 예술의 방파제이기도 하다. 또 예술의 독자성과 자발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떻든 예술가들은 현실에서 빠져나가 이상적인 세계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그들만의 유토피아가 만들어진 셈이다. 물론 또 다른 미술 양식이 다른 한편에서 전개되었지만, 낭만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유토피아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예술은 맹목적이고 이상주의적인 무엇이며 순진무구의 세계이며, 또 실험 정신이 뛰어난 전위적인 세계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의 대중화를 논한다. 현실이 아닌 이상주의와 전위적인 삼차원 사차원의 세계가 과연 대중과 친해질 수 있는지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마치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술과 친해지고 예술을 사랑하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꺼내는 이야기 같지만, 실상 내면은 그와 반대이다. 대다수의 예술가들은 대중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 감히 자신의 세계를 그렇게 쉽게 이해한다는 것이 어쩐지 싸구려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어쩐지 얄팍해 보여서 내키지 않는 것이다. 어찌 보면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것이 대중화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 보다는 희소가치로 인정 받고 싶다. 귀족으로써 성공하고 싶다. 여기에 순수예술의 묘미가 있다.
도예의 경우는 어떨까? 순수예술이라는 계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들도 예술가이다. 그들도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아야 하고, 대접 받아야 한다. 그래서 도예가들은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기 위하여 양식과 틀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이 시대의 요구인 것처럼 자신만의 형식을 만들어내기에 위하여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외형적인 손재주만 가지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숙련된 손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과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내면의 통찰이 있어야 한다. 이 경지에 이르면 도예가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누구도 대중화보다 귀족화를 꿈꿀 것이다. 그렇다면 대중화된 도예란 산업도예를 말하는 것일까? 실용도예를 말하는 것일까?
이제 우리는 ‘대중화’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대중화란 무엇인가. 실용주의에 바탕을 두고 누구나 쉽게 구하고 얻을 수 있다면 대중화된 것일까. 그렇다면 수공적 제작 방식의 결과 유일하며 단일한 생산품은, 따라서 값비싼 것은 대중화와 거리가 먼 것일까. 진정한 대중화란 전자도 후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한눈에 반해서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라, 오래 되어도 질리지 않는 우러나는 맛이 있어 모두의 마음을 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러한 깊은 맛이 없다면 그것은 한 순간을 풍미하고 잊혀지는 유행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명작의 경우를 보면 그것이 희소가치라는 명분도 있지만, 누가 보아도 감동을 자아낼만한 요소가 작용하기 때문에 명작일 수 있는 것이다. 명작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꼭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는 공동분모가 곧 예술의 대중화가 아닌가.
물론 대중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들은 보다 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어떤 것을 바란다. 형이상학적 이야기나 철학적 소견이 대중과 쉽게 친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중을 문외한으로 업신여기는 일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대중화란 곧 저급한 문화의 한 부분이라고 이해하는 것도 같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감동을 준다는 것은 내용이 형이상학적이든 철학적이든 형이하학적이든 구체적이든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 감동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마음으로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감동은 충동적인 것과 다르다. 한 순간의 충격과 감동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대중화란 전자가 아니라 후자이다.
도예가들은 얼마만큼 대중화에 성공하였나? 혹시 대중화보다 귀족화에 더 힘을 쏟지는 않았는지, 주변의 여러 조건에 발맞추기에 급급한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볼 일이다. 순수예술에서의 독자적인 자기세계와 자기발전이라는 긍정적인 면보다 자아도취와 같은 부정적인 점만 취한 것은 아닌지 돌이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추상작업은 마음의 눈으로 봐야 한다고 가르친다. 만약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관람자의 촌스러움과 무식함으로 결론짓기 십상이다. 그러나 작가의 눈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따져 주지 않는다. 특히 우리의 문화 환경은 더욱 더 그렇다. 작가의 사회적 지위가 작품의 지위도 규정짓고 있기에 대중은 순수한 작가와 작품을 만나기 어렵다. 대중은 이해 못할 작품 앞에서 소외당하고 만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보여 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예술이 그 사회의 거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현상이지만 말이다.
지난 세기를 돌아보면 도예가들은 시대의 변화에 약빠르지 못했다. 덕분에 다른 영역의 예술 행위를 뒤쫓느라 허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넓은 시야를 확보하기 보다는 첨단의 무엇을 찾아 앞만 보는 것 같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과연 급변하는 이 시대에 변화의 물결만이 다 일까? 모든 것이 세계화 되고 영역별의 구분이 모호해 지는 요즘, 도예가들의 몫은 무엇일까? 아직까지도 순수예술을 위하여 에너지를 모을 것인지 검토해 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예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무엇이라고 이해하는가? 무엇이라고 해석하는가? 혹시 예술에 대한 선입견은 갖고 있지 않은가? 전위적이어서, 추상적이어서, 품격을 앞세워서 등등의 이유로 열등감이나 우월감의 지배를 받고 있지는 않은가? ‘도자예술은 미술의 새로운 개념이다’라는 표제는 어쩐지 그러한 우월감이나 열등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 도자예술은 이미 미술의 영역 안에 있다.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는 것은 작가의 역량이다. 이 역량은 도예가에게만 특별히 부과된 과제가 아니라 모든 예술가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예술가란 대중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발견해서 대중에게 보여주고 깨닫게 해 주는 매개자이다. 미술작품이 때로는 사회 변혁을 위하여, 때로는 정신적 해방을 위하여, 또는 사회 계몽을 위하여 이용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표현하는 가에 있지 미술 안에서의 영역 구분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도예가들은 어떤 비전을 제시해야 할까? 새로움을 위한 새로운 추구나 이벤트 성격이 진한 전위적인 시도, 또는 실험정신을 엿볼 수 있는 표현 등이 아직도 주목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청자 백자의 재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현대예술, 특히 전위예술은 전통적 가치관이나 예술적 관습, 그리고 그 언어에 대한 질문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그렇기에 많은 현대 예술 작품들이 난해하다는 판정을 받는다. 경우에 따라 어떤 것은 무의미한 것으로 세상으로부터 거절당하기도 하지만, 현대 예술가들은 관객편의 인식과 지각 등에 무관심하다. 현대 도예가들 역시 그 안에 편입되어 자신의 언어를 만들어 낸다. 그 언어가 모호할수록 작가는 자신의 철학을 내세운다. 그러나 때로는 궁핍하기 짝이 없는 철학으로 합리화시키기에 길들여지기도 한다.
예술작품이라는 현대적 개념은 미술관의 출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전시를 위한 공간과 이 공간에 전시되는 작품들은 과거에 그들이 맡고 있었던 종교적이고 세속적인 사회 기능으로부터 이미 멀어져 있다. 미술관 직원은 일상 하듯이 소장품을 연대순으로 또는 국가별, 유파별로 배열한다. 이 같은 유형상의 분류는 미술사가에게는 유용할지 모른다. 그러나 예술이 사회의 현실적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원래 자율적으로 성장해 왔다는 착각을 심어 준다. 작가들이 미술관이나 화랑을 위해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 전에 시작된 일이다. 이제 예술은 예술 그 자체로 존재하고 관계하고 제작된다.
순수예술을 순수하게 만드는 고유한 매체나 재료, 제작방식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을 구별 짓는 잣대는 재료나 도구가 습관적으로 사용되는 방식과 그에 상응한 형식적 관례에 따라, 또 그 속에서 제작, 분배, 소비에 따른 사회제도인 것이다. 여러 세기에 걸쳐 예술은 지배계층의 이해관계 속에서 시녀 노릇을 해 왔고, 투자되어 왔다. 18세기, 시민계급이 귀족계급으로부터 권력을 쟁취한 이후, 시민계급은 귀족계급이 육성해 놓은 문화를 상속 받았음은 물론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순수예술은 사회 중간계층의 관중에 의해 감상 되고 부양된다. 오늘날 지속되고 있는 순수예술은 어쩌면 전산업사회가 남겨 놓은 하나의 ‘잔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순수예술은 여타의 어떤 예술보다 독자성을 보존하고 있고,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게다가 커다란 가치까지 부여 받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순수예술이 지니고 있는 독립성과 자유성에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러한 특권에 발맞추어 그만한 창의력과 실험정신이 뒷받침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대다수의 예술가들이 만성적 기량부족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으니 말이다.
분명히 순수예술은 대중예술의 반대편에 있다. 대량 생산되어야 하고, 저렴해야 하고, 재치가 있어야 하고, 소비가 쉬워야 하는 대중예술은 순수예술과 다른 시각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두 견해를 놓고 어떤 것을 선택해서 지향해야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자리에서 각각의 모습을 흉내내기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자세에 있다. 작가정신이란 심오한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실험정신을 구사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강박증이다. 명작이란 감동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고, 감동은 대중과 함께 한다. 대중은 진실을 담고 있는 예술품을 원한다. 도예의 대중화는 곧 예술의 대중화이다.
「현대의 EVE」 임윤선 作
「들꽃을 담는 그릇」 성미경 作
노혜신 作
필자약력
서울여자대학교 공예과를 졸업
파리VIII대학서 ‘칸딘스키와 추상화’ 석사학위
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비평 부분 당선
동국대, 서울여대 등 강의
한원미술관 관장 역임
현,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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