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 되어 떠나는 여행
글/전용일 금속공예가
한애규의 ‘여자’들이 길을 나섰다. 일상에서 일어나 짐을 꾸리고, 몸서리치던 자신과의 대면(對面), 그 무게를 털어내면 나는 처음으로 ‘타인’이 된다. 일탈, 자유, 고독, 사유의 파편들이 모래바람처럼 일어 몸을 때리는 그 여행길은 마냥 허허롭고 또한 준열하다. 당신은 떠나본 적이 있는가? 타인이 되어본 적이 있는가?
그 길에서 나는 기웃거리며, 엿보며, 꿈꾸고, 회상한다. 세상과 만나는 길목마다 목을 늘이고, 귀 기울이고, 냄새를 맡고 손을 내민다. 오색 형상의 빛깔들, 시간의 궤적, 역사의 뒤안과 덧없음, 부조리… 그것을 담아내기에 내 혀는 너무 짧고 내 몸은 너무 작다. 마음을 비워내면 어느덧 나는 구경꾼이 되어 저자를 걷다가, 연원조차 알수 없는 폐허에 서면 내 여정은 시공을 뛰어 넘는다. 내 지도의 끝은 어디인가? 내 삶의 끝은?
넉넉하고 튼실한 ‘한애규 표’ 여자들은 풍요의 여인으로, 생산의 모태로, 분노의 여성성으로, 90년대 이후 이 땅에서 솟아오른 아이콘이다. 느끼며, 사유하고, 행동하고, 저항하는 이들은 이 어지러운 시대의 한복판에서 여성에 관한 내러티브을 주도한 이야기꾼들이다. 그 이야기는 미술과 공예, 기능과 탈기능, 개념과 기술 등의 물음이 끼어들 필요도 없는, 가장 아프고 선명한 논증의 세계였다. 아픔처럼 분명한 것이 있을까? 그래서 많은 이들이 열호했다. 그 아줌마들이 계속 우리 삶을 이야기하도록, 우리 시대를 증거하도록…
어느 날 잠에서 일어난 이 여인들은, 손에 있던 모든 짐을 털고 길을 나섰다. 가장 간편한 복장의 몸뚱이들은, 이전에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듯, 그 삶으로부터 유리된 여행길의 이야기들을 그리고 있다. 여행은 물론 삶의 연장이리라. 그러나 마치 활동사진의 각 장면처럼 연속적이고 반복적인 모습으로 화랑 공간에 도열하여 ‘설치’된 여인들의 행렬은 사뭇 다른 표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국의 땅에서 보여주는 이 여행자들의 ‘바디랭귀지’는 현실의 승화인가? 아니면 모든 버거움의 초월인가? 아니면 잠시 휴식을 위한 외유인가?
그래서 벌써 다음 작품들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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