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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도자의 복원과 계승
  • 편집부
  • 등록 2004-03-17 01: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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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승청자를 중심으로 글/사진 최선일 한국미술사 비색청자의 재현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한 1900년대를 전후하여 고려청자 수집이 늘어나면서 개성이나 강화도에 있던 고려고분(高麗古墳)들은 도굴로 인해 무참히 파괴되었다. 당시 이러한 상황은 신문이나 재판기록<사진1>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특히 1906년부터 1908년까지 집중적으로 고려무덤이 도굴되었는데, 청자를 사용하지 않았던 일본인에게 12세기 절정기 고려청자의 비취옥과 같은 비색청자(翡色靑磁)는 무한한 신비감을 주었다. 일본의 우시야마 쇼죠는 “누가 나에게 신에 이르는 길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고려청자를 통해서”라 칭송할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 초에 청자 재현에 대한 시도가 구체화되어 1907년 10월 서울에 청자연구회가 조직되고, 평양에는 자기점이 문을 열었다.1) 특히, 도산 안창호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펴던 신민회는 민족산업의 부흥을 위하여 1908년 10월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11월 당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자기를 생산하여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1908.10.18)에 “평양(平壤)의 자기발명(磁器發明)”이라는 논설이 게재되었다. “… 物品製造는 高麗靑磁壹種이 世界 眼目에 對하야 舊時代의 文明한 證據를 發表하더니, 今日에 至하야 平壤의 磁器製造가 新光線을 呈露하니 이는 大韓新時代物質文明의 嚆矢이다”는 기사를 통하여 생활용기인 백자와 다른 자기를 제작하였기에 도자 발명이니, 신시대물질문명의 효시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근대 청자의 제작은 1908년 한성미술품제작소가 1912년 이왕직미술품제작소(李王職美術品製作所)로 이름을 바꾼 후, 도자부(陶磁部)를 신설하여 비원(秘苑)의 후원에 가마를 짓고 ‘비원자기<사진2>’를 생산하였다. 당시 신문에는 문인·묵객들이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는 기사와 현존하는 사진을 통하여 고려청자와 유사한 자기를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2) 이 시기에 청자의 재현에 노력했던 장인들은 해강 유근형, 황인춘, 유근호, 최남성 등으로,3) 1883년 사옹원의 광주 분원이 민영화된 후, 800년 단절되었던 청자 재현에 성공한 인물<사진3>로서 현대도자의 전승 1세대로 평가할 수 있다. 전승도자의 박제화 그러나 일본인의 자본을 바탕으로 한 전승도자 제작은 구매력을 가진 일본인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과 동떨어진 고려청자의 기형과 문양을 복제하는데 그쳤다.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은 전국의 국·사립박물관에 전시된 고려청자, 분청사기, 백자와 유사한 기형과 문양을 가진 작품을 전통도자(傳統陶磁)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통은 관습(慣習), 관례(慣例) 등과 같이 인간 생활과 삶을 바탕으로 형성, 변화, 계승, 소멸 등의 과정을 거친다. 따라서 전통은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반영해야 전통이라 부를 수 있다. 1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전승도자의 재현과정은 일제침략기에 성립된 청자의 신비감이 은근히 깔려 공예의 실용성보다는 장식성이 강조되었다. 화목가마에서 1250℃ 이상의 고온에서 자기가 구워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고려시대 백운거사 이규보의 시에 “… 열에서 하나를 얻었다…”고 한 것은 당시 작품의 성공률이 낮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성공률은 쓰임새의 유무(有無)에 있지, 단지 기형과 유색의 좋고 나쁨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마에서 작품을 꺼낼 때, 대부분 사람들은 엄숙한 자세로 작품을 감식하고 깨는 장인의 모습을 생각한다. 이것은 도자공예의 진정한 모습이 왜곡된 결과이다. 인간의 손으로 제작된 공예품은 인간의 얼굴이 다르듯이 각각의 형태와 문양을 가지고 있다. 동일한 사람에 의하여 제작된 것도 매 순간 달라지는 것은 인간의 감성이 공예품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수작업(手作業)을 한 공예품이 틀에서 찍어낸 붕어빵 같이 천편일률적이라면 전사지(轉寫紙)와 도장을 사용하는 것이 공예적인 성격을 반영한 것이다. 결국 우리의 생활과 동떨어진 도자기를 제작하다보니, 전승자기는 고려청자를 대신해 거실이나 사무실을 장식하는 쓰임으로 한정되어 지금까지 계속해서 틀에 박힌 기형과 문양을 대량생산하게 된 것이다. 전승의 나아갈 방향 모든 사람이 고려청자에 대한 우수성을 논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지나쳐서는 안될 문제가 있다. 첫째는 고려청자의 유색, 기형, 문양 등이 주는 느낌을 전해주는 현대 전승작품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점은 고려청자의 색을 얻고자 하던 1세대의 전승장인의 작품경향을 다음 세대들이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제 고려청자의 체계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작은 부분까지 청자의 느낌을 줄 수 있는 작품으로 나아가야 한다. 둘째로 전승은 전통적인 제작방법에 대한 습득이 결합되어야 한다. 과학의 발전으로 발 물레 대신에 전기 물레가, 화목가마 대신에 가스가마로 변하더라도 전통적인 제작방법의 장점은 계승되어야 한다. 과연 현대 전승청자가 고려청자와 얼마나 다르고, 화목가마와 가스가마에서 나온 청자의 유색의 차이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곤혹스러운 질문이라 여러 번 답변을 주저하다가 지금은 “전기밥통에서 한 밥과 가마솥에 한 밥의 차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차이가 좋고 나쁨에 대한 개념은 아니다. 단지 자기 생산의 기술이 제대로 전승되어야 도자기에서 느낄 수 있는 감성이 풍부해진다고 생각한다. 셋째는 우리의 먹거리를 담아낼 수 있는 디자인과 소지 개발이다. 이태리 음식인 피자가 대중화 된 이후 우리의 전통음식인 김치와 결합되어 김치피자가 만들어지듯 우리 음식에 맞는 전승자기의 개발이 필요하다. 2001년부터 시작된 강진청자공모전은 우리나라 중세미술을 대표하는 청자를 구웠던 지역에서 차별화 된 전략으로 성공한 공모전이다. 작년까지 3회에 걸쳐 출품작의 수준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나날이 향상되었다. 그 중에 구본진이 출품한 청자상감국접압문식기류<사진4>의 유색은 녹색을 띠는 전형적인 이천스타일로, 13세기 후반의 청자상감포류수금문대접에서 볼 수 있는 자연의 소재를 깔끔하게 처리하여 여성들에게 호감을 줄 정도로 전승자기의 실용화에 접근한 작품이다. 이 공모전의 심사위원들은 심사기준을 “청자의 유색, 기형, 문양”이라 언급하였다. 4) 이러한 심사의 기준이 현대 전승청자가 나아갈 방향이며, 고려청자의 절정기인 12세기 청자의 유색과 기형, 문양을 제작할 정도의 기술력과 그것을 바탕으로 현대 감각에 맞는 청자의 제작이 이루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전통도자의 복원과 계승이라는 논의에서 그 도자기를 사용하는 소비자의 입장이 반영되어야 한다. 전승청자를 집에서 쓰는 사람들 가운데 청자는 백자에 비해 음식을 올려놓으면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렇다면 생산자는 내면에 퇴화기법을 사용한 청자를 생산하여 백자에서 주는 분위기를 대신해 줄 수 있다. 결국 생산자의 자기(磁器) 쓰임에 대한 고민은 우리의 전승도자를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다. 2년 전에 멕시코시티민속박물관에 전시될 도자기를 선정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12세기에 제작된 청자투각향로의 재현품을 추천해 준 일이 있다. 남미의 박물관에 청자를 선정한 것은 가장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문화유산이고, 향로는 악취를 제거하여 사악한 기운을 없앤다는 용도가 남미인들에게 설득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한국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제대로 된 전승공예품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필자는 요즘 전승공예를 전공하는 대학원생들과 전승공예품의 재현(再現)을 주제로 작은 전시회를 가질 생각이다. 학생들에게 재현하려는 유물을 실견·실측시켜 규격, 문양, 기법 등을 동일하게 만들 생각이다. 이러한 작업은 유물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작업을 시켜 전승을 생각하는 후학들의 방향성을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완성된 작품은 전시회를 통하여 일반인들에게 오감(五感)으로 느끼게 할 생각이다. 최근 전승공예품의 질과 양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결국 전승공예도 앞으로 질의 고저를 기준으로 공예시장이 세분화되어야 한다. 사회적인 의식 수준이 높아지는 것은 명품(名品)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한국의 전승도자 역시 세계시장으로 뻗어나가는 시도를 꾸준히 추구해야 한다. 1) 최공호, 「‘工藝’ 용어의 근대적 개념 전개」, 『美術史學』 17, 2003. 2) 매일신보 1919년 4월 3일(최공호, 「이왕직미술품제작소 연구」, 『고문화』 34, 1986. 9) 3) 柳根瀅, 『高麗靑磁』, 弘益齋, 1982; 조정현, 「한국 대학도예교육의 시작과 황종구 선생」, 『월간도예』 3, 1996.6. 4)최건, 「청자유(靑磁釉)의 이해」, 『제1회 청자공모전』, 2001, p.4. 필자약력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수료 강진청자자료박물관 전시운영담당 역임 김포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근무 경기도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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