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토 - 꿈 다듬기
글+사진 리승철 _ 도예가
작업실 곁 뚝방을 따라 곧게 올라가면 산모퉁이를 하나 꺾어 고려시대 초기에 축조되어 그릇을 번조하던 가마터가 있다. 지금은 잡초가 무성하고 유적지라며 둘러친 낮은 철제 울타리로 에울러 있다. 세월의 두께만큼 켜켜히 쌓인 도편(陶片)들이 흙더미 밖으로 해묵은 속살을 드러내고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박물관이나 도자사 책자 또는 유물서적 등에서 화려했던 고려청자의 모습을 감상하며 찬란했던 고려인의 꿈을 느낀다고들 한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 놓여진 세월의 흔적들은 허물어 스러진 가마터 위로 떡갈나무를 키워낸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90년 중반 첫 번째 개인전을 열며 나는 아주 오래되어서 이제는 제 역할을 상실해버린 전통도구들을 모티브로한 도자조형전을 펼친바 있다. 모티브로 다루어진 물상들은 세월의 두께만큼이나 깊은 향수를 품고 마치 이제껏 없었던 것이 새삼 눈앞에 놓여진 것처럼 새로움으로 느껴졌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처음 보는 물건에 지나칠 정도로 강한 집착을 보이곤 했던 것 같다. 그것이 신기함, 호기심 혹은 낯섦에 대한 즉각적 반응이기도 하였거니와 새로움에 대한 두근거림이기도 하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첫 번째 개인전을 위해 작업을 하면서, 새롭기까지한 오래된 도구들의 형식을 변용하며 그것들을 제작하던 방식을 쫓다보니 그것을 두고 과연 이것이 도예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이 생겼다. 이 물음에 대하여 나는 그 ‘작품’들이 도예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유보적인 대답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 물음이 무엇이 도예이고 또한 도예가 아닌가하는 근복적인 물음보다는 도대체 이 낯선 물건이 무엇에 소용되는 물건일까? 라는 물음을 갖게하기 때문이었다.
아주 오래됐지만 내겐 낯선 이 물체들이 오래되지는 않은 물체들과의 관계에서 ‘소용성’에 대한 동등한 질문만을 만들어낸다. 다만 양자의 차이는 오래되었는가, 그렇지 못한가하는 감각의 반응만을 줄뿐이다. 바로 이 감각 반응에 주목한 나는 오래된 사물로부터 도예작품에 이르는 조형어법을 찾고자 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전통도구들은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철저하게 수공적인 제작과정을 거치고 자연으로부터 얻어진 재료를 가공하며 재료에 순응하는 바 그 자체가 이미 자연의 생성원리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나의 작품에 있어 표현의 매재인 점토는 가소성 소재이면서 딱딱하게 굳어지는, 그래서 목재와 같은 재질을 갖기도 하고 소결체로서 돌과 같이 쪼아지고 깨어지는 재료이기도 하였다.
전통도구의 제작과정이 그러하였듯 대부분 목재를 소재로 만들어진 이 모티브들은 깎고 끼워 맞추며 다듬어진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세월의 변화와 함께 제 모습을 갖추고 고졸한 느낌을 전해주는 방식으로 현전된다. 나의 작업 속에서 추구했던 모티브들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이러한 감각은 ‘아르카이즘(古拙主義)’에 대한 짙은 향수가 아닐까 싶다.
두 번째의 개인전을 가지며 나는 첫 번째 개인전을 열며 천착했던 주제를 좀더 다루어 보고자 ‘명상-도구상자’라는 전시를 가졌다. 첫 번째 개인전이 도구들의 표피로부터 얻어지는 세월의 감(感)에 주목하였던 바, 두 번째 개인전은 도구들의 의미해석에 근접하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서 도구들이 도구로서 존재하기위한 방식을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이전의 작업방식이 완결체로서 하나의 도구가 갖는 조형형식미에 탐구하였던 것이었다면 물질성을 약화시키고 물체성을 강조하는 그래서 구조적 특이성을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형상과 형상을 결합하여 어떤 ‘형성물(形成物)’을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부속되거나 연합되어진 그리고 상관되는 형체들이 만들어내는 질서와 조화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두 번째 개인전을 기점으로 나는 어떤 도구를 어떤 사물로 인식하게되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도구로서 하나의 사물 또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유한한 생명을 갖고 있지는 않을까? 눈앞에 놓여진 한정된 시간에만 존재하는 사물, 단지 한순간을 사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보면 사물과 삶에 대한 우리의 인상은 기억 속에서 강하게 흡수된다. 사물은 유한하다. 사람 또한 사물과 마찬가지로 유한하다. 다만 이들은 자신을 쇠퇴시키므로서 새로운 창조를 잉태하는 모태가 된다. 따라서 이들의 존재방식은 단지 성장의 형태로만 가능하다. 태어남과 죽음은 통제할 수 없고 그러한 것일 뿐이다. 그나마 조절 가능한 것은 성장이고 보면 그 조절의 모습이 매일매일 드러나는 삶의 단면인 것이다.
나는 작업 속에서 조형을 우연히 얻어내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의도하고 계획되어진 틀로 다가서기를 즐긴다. 생명의 태어남과 죽음이 내 몫이 아니듯 그저 애초부터 있었던 사물을 끄집어내듯 작업하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조절 가능한 성장의 영역-형상을 다듬고 구체화시키는-에 더 많은 노력을 한다. 따라서 유약을 사용하면서도 나는 우연의 효과를 최소화하고자 반복된 실험을 한다.
오늘도 나는 고려인이 간직했던 꿈의 세계에 다녀왔다. 그 수많은 파편들은 무슨 의미일까? 저들의 꿈은 상감청자와 같은 우수한 문화재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믿고 있다. 그들이 어제의 실험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에 미치지 못한 많은 부서진 꿈들을 파편과 함께 흙더미 속에 묻었다. 그들의 꿈은 참으로 소박하다. 바로 어제 잘 번조되어 나왔던 그 청자처럼 오늘도 그에 다름 아니길 꿈꾼다.
작가약력
서울산업대학교 도예학과, 동대학원 졸업
개인전 2회, 초대전·단체전 70여회
고양시 삼송동 ‘다린공방’ 운영
서울산업대학교, 인덕대학 강사
성신여자대학교 강사
경일대학교 초빙교수
대구예술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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