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홍성희 _ (재)세계도자기엑스포 도자연구팀 출판사업 및 도자연구 담당
작가는 눈에 보여지는 세계로부터 또 다른 현실세계를 본다. 그곳에는 낯선 세계에서 서로의 인연으로 맺어진 나와 사람들 그리고 생소한 풍경이 있다. 작가는 이러한 모티브를 놓치지 않고 작업 속에서 인연의 끈을 풀어낸다. 작가가 마주치는 낯선 사람들, 낯선 풍경, 낯선 바람은 계속하여 작가를 자극하고 그들로 인해 작가는 온몸으로 새로워진다.
여선구는 매우 독특한 배경을 가진 작가이다. 미국과 한국, 양국의 매우 이질적인 역사와 문화를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그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그의 예술세계의 모태인 한국 문화의 쇠퇴와 한계를, 도미渡美 후에는 서양예술사를 바탕으로 하는 미국미술교육에 내제된 서양철학과 한국적 감성과의 괴리를 경험해야 했다. 여전히 그가 느끼는 문화적 괴리와 갈등은 여느 작가에게나 그러하듯 혜택이며 동시에 갈등의 근원이다. 이러한 괴리감에 의한 문화 충격은 여선구로 하여금 지난 10여 년간 다른 작가들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하도록 만들었다. 여선구는 다른 도예가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창작의 즐거움과 만족감, 그리고 개념을 세워가는 창작의 즐거움을 아는 작가다. 우리가 조금만 그의 작품에 눈길을 주어도 그들은 그가 얼마나 야심에 찬 작가인지 얼마나 다양한 문화와 철학이 녹아들어 있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흔히 도자기를 ‘세계 최초의 연금술’이라고 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의 진부한 삶의 쓰레기와 폐기물들을 자신의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는 여선구는 흙과 불이 완벽히 결합된 작품을 만들어낸다. 연금술사처럼 납을 녹여 금으로 탈바꿈시키듯 여선구는 도자조각이라는 조형양식을 통해 문화와 자연을 자신의 작품 안으로 융화시킨다.
여선구 작업의 특징은 서술적 이야기 구조에 있다. 등장인물들이 특정 사건을 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작품을 나레이티브한 면에만 초점을 맞추어 이해한다면 그의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있어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하고 혹은 자극적인 이야기 전달이 아니다. 영원히 편입될 수 없는 문화의 아웃사이더로서 바라보는 사회의 암울한 단면, 그 안에 살고 있는 객체들의 뚜렷한 감정의 소용돌이, 얽히고 절대 끊을 수 없는 수많은 인연들로 그의 작업은 점철되어 있다. 보다 그의 작업을 잘 이해하려면 3차원적 관찰방법이 필요하다. 한정된 원 혹은 사각의 중심에서 위로 불뚝 솟아 저마다 입상들이 키높이를 자랑하는 그의 작품들은 작가가 처해 있는 환경과 심리상태, 나아가 현대인들이 살아내는 곤고한 삶의 단면을 여실히 드러낸다. 작품 전면에 흐르는 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들은 작가의 내면 깊숙한 곳의 잠재된 기억들이 상상력을 타고 인식의 수면 위로 떠올라 시각화 한 것이다. 언뜻 보면 사람을 비롯한 다양한 오브제 군상들이 뒤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전체적인 흐름은 형태와 형태 사이 미묘하고 복잡한 공간구조에 의해 주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조형구조는 재료-흙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능숙한 기술이 전제될 때 가능하다.
예술가들은 과학자들과 달리 논리적으로 표현대상을 분석하거나 지나치게 하나의 부분에 집착하지 않는다. 작가의 손은 그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대상을 표현해 내며 직관이 육체를 지배하는 순간 그 육체는 곧바로 또 다른 형상을 복제해 낸다. 여선구는 수많은 드로잉을 통해 실현가능성을 타진하고 작가의 직관을 흙에 전이 시킨다. 서로 맞물린 형상들을 하나하나 공간으로 이관시키면서 이들은 작가의 직관에 의해 새로이 부여된 질서로써 재구성된다. 이러한 구상의 방법에 따라 부분이 점차 하나의 작품으로 어울려진다. 지금의 제단식 구조를 갖추기까지 여선구는 많은 실패를 경험했다. 강력한 자연의 힘-중력과 불의 영향을 받는 도조의 특성상 작가들이 적당한 기둥 없이 높이를 확보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초기에 흙과 불을 완전히 숙지하지 못했던 그는 불 속에서 무너지고 때로는 형체도 없이 폭파되어 사라지는 좌절을 수없이 겪었다. 이러한 실패를 바탕으로 결국 그는 성형 건조 번조의 과정 등 주변의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자기질 태토를 사용하여 선명한 발색을 확보하면서도 동시에 크기에 대한 한계를 극복해내는 놀라운 성형기술을 보여주었다. 이제 더 이상 흙은 그에게 투쟁의 대상이 아니며 극복해야할 대상이 아니다.
그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들은 대개 호랑이, 오리, 두개골, 전통적 지붕구조, 울부짖는 개, 하나의 몸 위에 달린 남자와 여자의 머리, 까마귀, 개미, 마천루, 겹쳐진 차들, 새싹들 사이에 피어난 꽃, 옥수수대, 말, 물고기, 상자, 욕조, 성직자, 의사, 왕, 아이들, 엄마와 아빠, 삼촌과 숙모, 신화 속 동물들 등 다양한 오브제들이 등장한다. 여선구의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이러한 등장인물 혹은 각각의 대상들이 하나의 무대 속에서 서로 소통하는 동시에 보는 이들 조차 소통의 공간으로 끌어들여 그들이 작품의 메시지 습득에 대하여 능동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또한 등장하는 배우들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크고 작은 공간들은 그의 작품을 더욱 함축적으로 만든다. 여선구의 작업은 극히 수직적 구조를 취한다. 우리는 그의 작업이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어떻게 뼈대가 형성되고 저마다 의지하며 균형을 유지하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작가가 지구의 자연적 힘 - 중력과 맞서서 어떻게 기술적인 부분들을 해결하고 개념적인 부분과 스토리라인을 조화 및 조율하는 지 알아가는 과정은 참으로 흥미롭다. 여선구의 작업 속 캐릭터들은 하나이면서 독립적이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관계는 시간을 거스르며 하나의 결말로 귀결되는 거창한 스토리라인을 갖고 있지 않지만 그들의 관계가 만들어가는 긴장감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의 작업은 얽이고 얽혀 구조와 구조를 맞댄 채 중력에 맞서 서로의 몸무게를 이겨낸다. 또한 그들은 하나의 커뮤니티를 창조하며 그들만의 독특한 아우라를 구축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세계와 구분되는 그들만의 세계다. 떼 지어 있고 키높이가 다른 군상들과 오브제들 - 작가의 히로인들은 작품의 중심에 높이 서서 다른 오브제 혹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 일관성과 상호의존성을 관장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이 가장 극대화된 작품이 바로 「알프레드 섬머Alfred Summer」이다. 세계도자비엔날레 공모전에서 500대 1의 경쟁을 통해 명예의 대상을 받은 작품인 「알프레드 섬머」는 알프레드 대학의 여름 강의를 하면서 한 달반 동안 제작한 작품이다. 그곳에서 만난 다양한 민족, 국가의 사람들과의 삶과 경험을 담아낸 작품으로 높이 2m43cm의 대작이다. 아프리카 인물상들이 탑 모양으로 결합된 표현주의적 기법의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으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살아있어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 인물들의 표정은 저마다 가지각색이다. 서로를 미워하는 듯. 서로를 감싸는 듯 때로는 반反하고 때로는 합合하면서 그들은 탑을 이루었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혼돈≫이라는 주제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여선구는 끊임없이 삶의 아이러니함 위험 슬픔 파괴 아름다움 권력 모호함 등 우리 삶의 혼돈들을 일종의 시적언어를 동원해 도자예술로 풀어낸다. 혼돈은 서로의 몸에 의지하여 새로이 배열되고 넘어지며 또 다시 하나의 인격체로 귀결된다. 이러한 혼돈의 개념은 그가 주로 사용하는 복합색체로 인해 더욱 구체화된다. 도자예술은 단순히 작품 성형에 그치지 않고 불 속에서 유약이 녹아 흐르고 예상하지 못한 효과들이 어울려 지면서 비로소 완성되는 예술이다. 불 속에서 그의 히로인들은 얼굴 팔 몸 다리에 흐르는 끈적거리며 흘러내리는 유약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색채의 병합으로 더욱 분명한 감정을 드러낸다. 흘러내리는 유약들은 마치 형태가 녹아내리는 듯이 보이게 한다. 여기에 유약의 병치된 화려한 색은 오브제 사이의 암울한 어둠과 맞물려 나와 외부세계와의 거리, 내 정신의 혼돈을 더욱 극명화시킨다. 아래로 아래로 중력에 순응하는 유약의 폭포는 동시에 불의 흔적이다. 유약은 작가가 제공하는 인위적 번조조건 속에서 흐르고 겹치는 과정을 겪지만 작가의 의도에 연연해 하지 않고 예상치 못한 또 다른 결과들을 내놓는다. 병치된 유약은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개체 마다 다른 감정들을 부여한다. 어떤 것은 반짝거리며 어떤 것은 매트하다. 이것은 따로 떨어져 행동하지 않고 서로 어울리고 서로 섞이며 동체가 된다. 그의 작품은 특히 유약에 의한 번조 상의 우연효과에 많이 좌우되기에 그는 오랫동안 고온에서 번조할 수 있는 유약 개발에 집중해 왔다. 알프레드에서 그는 평균적으로 1000가지가 넘는 유약들을 실험했으며 현재 이 중 40에서 60여개에 이르는 유약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유약을 도자 파렛트로서 뿐 아니라 화학혼합물로서 유약을 바라본다. 따라서 그는 화학물로서 유약에 대한 지식습득은 그에게 성형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이다. 그 결과 남들이 흉내 내지 못하는 그만의 유약을 갖게 되었으며 그의 유약처리는 단순한 표면장식이 아니라 바로 발색자체가 내용이 되었다.
여선구의 작업이 흙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형태가 시작된다면 그의 작업을 완성하는 것은 불과 유약이다. 온도가 변화하는 과정과 자연적인 현상이 함께 어우러질 때 그의 작업은 드디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다. 때로는 이러한 가마내의 극심한 변화와 의도하지 않은 자연의 힘이 그의 작품을 파괴할 때도 있지만 실패의 가능성은 더 나은 결과를 위한 포석이다, 모든 작가들은 이러한 위험한 게임을 자주 해야만 하고 이에 대한 결과 또한 감수해 내야만 하는 숙명을 가진 사람들이다. 또한 이것은 도전을 겁내지 않는 작가로서 야심이 그 마음 안에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결국 여선구의 작업은 자연의 힘, 가마 안의 만족스러운 변이, 재료에 대한 확고한 이해와 기술 등이 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혼돈과 맞물린 결과이다.
여선구는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1988년 홍익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1997년에는 미국 알프레드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현재 일리노이주 말콤(Macomb,IL.) 웨스턴 일리노이 대학(Western Illinois University)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전 세계에서 주목받는 대표적인 작가이며 세계 각국에서 초대전을 치르고 수상자로서 초청받고 있다. 2003년에는 제2회 세계도자비엔날레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여받음으로써 명실 공히 세계 도자계를 이끌어 나갈 대표적 인물로서 인정받았다. 그의 작품은 미국 워싱턴 D.C의 스미소니언 연구소 내 렌윅 갤러리를 비롯하여 필라델피아 박물관, 호놀루루 현대미술 뮤지엄 등 세계 각국 및 개인 소장가들에 의해 소장 중이다.
필자약력
1976년 경기 수원 출생
홍익대학교 도예과·동대학원 도예전공
00~02, 홍익대학교 도예연구소 연구원 재직
현, 재단법인 세계도자기엑스포 도자연구팀 도자관련 출판사업 및 도자연구 담당
웹사이트 과 에 도자조형론, 작가론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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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erazin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