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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다쿠미’(1)
  • 편집부
  • 등록 2006-01-13 17: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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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다쿠미’(1)

글+사진 문옥배 _ 한국공예협동조합연합회 전무이사

광복 60주년을 맞은 지금 우리는 아직도 일본 사람들을 미워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그들을 질타하고 있지만, 일본의 통치하에 서슬이 시퍼렇던 그때 잔인하고 포악한 일본 사람들 중에 우리의 공예문화가 좋아서 한국인을 사랑하고 한국인처럼 살다가 한국의 땅에 묻힌 이 사람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 1891.1~1931.4를 한국의 공예인들, 특히 도자기를 사랑하는 한국 사람들은 한번쯤 가슴에 떠 올려 보았으면 하는 생각에 이 글을 쓴다.         

아사카와 다쿠미씨는 공예를 자기의 분신처럼 사랑하고 일생을 공예와 함께 하면서 공예이론을 정립하여 공예인들에게 공예의 길을 열어주었으며, 특히 조선인과 조선의 공예를 조선 사람들보다 더 사랑해 우리 공예의 위상을 높여 준 이사람, 그리고 일본에서는 일본공예의 아버지라 불리며 동양에서 유일한 공예이론의 대가로 알려진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이하 그의 업적을 기려 선생이라 칭함)를 공예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데 결정적인 동기부여를 하여 주었던 장본인이다. 다쿠미씨는 그보다 2살 연하이다.
그는 또, 선의 미술에 매혹되어 조선에 왔으며 조선에 와서는 조선의 도자기에 반해서 조선의 도자기를 수집하고 가마터를 발굴하면서 탐구에 열중하여 ‘조선도자기의 귀신’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손꼽히는 도자기 전문가로 명성을 얻었던 아사카와 노리다카(1884-1964)의 친동생이다. 그는 1891년 1월 15일에 야마나시현 기타코마군 가부토무라(현재의 다카네정) 고초다 294번지에서, 아버지 아사카와 조사쿠와 어머니 게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0년 7월 15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후에 태어난 그는 사실상 유복자였다. 그는 아버지가 안 계신 대신 아주 엄하고 성실한, 여장부같이 강한 홀어머니 슬하에서 강인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다쿠미의 가족애
다쿠미는 특히 할아버지 오비 시토모를 많이 닮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렌카(두 사람 이상이 일본 고유 형식의 시를 번갈아 읽어나가는 형식의 노래)에 능하셨으며 책 읽기를 좋아하시고 귀천을 가리지 않고 온정으로 마을 사람들을 인도하셔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할아버지는 사례금을 받고도 봉투 뜯어보는 일을 아주 싫어하셨다고 하는데 이런 할아버지의 성격을 다쿠미가 가장 많이 물려받았다고 한다. 다쿠미는 이런 할아버지에 대하여 1928년 시비가 세워진 뒤 같은 해에 쓴 그의 저서    <조선의 소반>에 다음과 같은 헌사를 서두에 실었다.

경애하는 할아버님,
태어났을 때 이미 아버지를 여윈 저는 당신의 자애와 감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청빈한 생활에 만족하고, 일하기를 좋아하셨으며, 온정으로 마을사람들을 인도하시고, 마을일을 공평무사하게 처리하신 그 생애를 추모하게 되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금년 여름(1928년 5월) 온 마을 사람들이 다같이 고장의 수호신을 모신 숲(아쓰다 신사)에 할아버지의 송덕비(사실은 시비였음)를 세웠다고 들었습니다만, 멀리 고향을 떠나온 지 어언 20년, 성묘조차 마음대로 못하는 몸, 어찌할 도리가 없어 이 보잘것없는 책을 제물대신 올립니다.   
다쿠미의 외할아버지도 천성이 온후하였고 학문을 닦아 지역민을 위해 국학과 한학의 지도에 힘쓰셨으며 종교를 믿는 분이었다. 이러한 자질이 의지가 굳세고 독립심이 강하며 남을 보살펴주기를 즐겨하신 어머니를 통하여 다쿠미에게로 이어진 것 같다. 특히 어머니는 아주 성실하고 엄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일을 잘 돌봐주었다고 한다. 교회에 다니면서 경로회를 만들고 노인들을 집에 초대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잘 보살펴 주셨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항상 다른 사람들이 와 있었으며 가족들만 식사하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쿠미는 이렇게 성실하고 봉사정신이 강한 집안의 가풍을 그대로 이어 받은 낙천적인 인도주의자였다.       

다쿠미의 일생
다쿠미는 1897년 4월에 무라야마니시 심상소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01년 아키다 심상고등소학교에 입학하였다. 고등소학교를 졸업하고 1년간의 보수과를 거쳐 1906년 야마나시 현립농림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릴 때부터 나무를 좋아했던 다쿠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매우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1909년 3월 농림학교를 2등으로 졸업하고 아키다현 오타테의 영림서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그는 늘 조선으로 건너간 형 노리다카를 그리워하다 조선에 가기로 결심을 한다.
결국 그는 1914년(24세) 5월 11일 고향 야마나시를 뒤로하고 조선으로 건너가 5월 17일 경성 독립문통의 3의 6에서 조선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조선에 건너온 그는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산림과 산하 임업시험소의 용원으로 자리를 잡고 조선에서 생산되는 주요 수목과 외국에서 도입된 수종들을 재배하며 묘목 기르기에 관한 실험과 조사 등에 종사하였다. 다쿠미의 임무는 양묘였으므로, 종자를 채집하기 위해 조선 각지를 돌아다니게 되어 조선 사람들과 많은 접촉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식민지 조선을 깊이 이해하고 생생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 다쿠미는 형인 노리다카와 함께 조선에 살면서 형 노리다카의 조선도자기에 대한 남다른 관심에 공감하여 도자기를 좋아하였으며, 형과 함께 도자기를 찾아 조선의 산야를 헤매다니다가 조선의 도자기는 물론 조선의 민예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깊이 연구하게 된다. 

다쿠미는 농림학교 시절에 동창생인 아사카와 마사토시의 누나 아사카와 미쓰에와 1916년 2월 7일 결혼을 하였다. 1917년 3월 9일에는 장녀 소노에를 낳았다. 1921년 9월 29일 그의 아내가 서른 살의 나이로 병에 걸려 세상을 뜨게 되자 1925년 10월 20일 오키타 사키코와 재혼을 하게 된다. 다쿠미의 재혼은 거의 야나기 선생이 주도하여 치르게 되었으며, 결혼식도 야나기 선생의 집에서 거행되었다. 다쿠미는 사키코와 전처소생의 딸 소노에 이렇게 셋이서 경성에서 살았다. 다쿠미는 한복을 즐겨 입었으며 조선의 물품을 조선사람 보다 더 애용하였고 우리말을 할 줄 알았다.(당시 조선에 있던 일본인들은 거의 조선말을 배우지 않았음)
다쿠미의 집은 온돌방이었고 방안에는 조선 장롱을 두고 살았다. 야나기무네요시 선생의 아내 야나기 가네코가 “그분은 정말 조선 사람이었어요.”라고 할 만큼 조선 통 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조선 사람으로 오해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매우 가정적이어서 여행지에서도 아내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고 딸 소노에에게도 애정 어린 편지를 보내곤 하였다. 그는 아이들을 귀여워해서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과자 같은 것을 사 가지고 와서는 근처에 사는 조선 아이들에게도 나눠 주곤 하였다.  

아사카와 다쿠미와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으로 건너와 3년째 살던 중 1916년 8월 처음으로 조선에 건너온 야나기 무네요시 선생을 그의 형인 노리다카로부터 소개를 받고 바로 친해져서 두 주일동안 함께 골동품가게를 뒤지면서 자신의 집에서 체류하기도 하였다. 이때 야나기 선생은 다쿠미가 모아놓은 조선의 민예품에 매혹되었다. 이렇게 야나기 선생이 다쿠미의 집을 방문한 뒤부터 조선의 민중적 공예품의 아름다움에 반해 공예에 크게 눈을 뜨기 시작하게 됨으로써 다쿠미는 야나기 선생이 공예와 인연을 맺도록 동기를 부여한 장본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들 형제를 만난 야나기 선생은 이미 조선의 공예품 수집을 시작하고 있던 아사카와 형제와 좋은 파트너가 되었으며, 특히 다쿠미는 야나기 선생의 조선예술품 수집활동에서 최고의 안내자 역할을 하였다. 실제 야나기 선생 본인도 내가 조선의 것을 알게 된 기회가 생긴 것은 무엇보다도 다쿠미 형제를 알고 나서부터였다고 후일에 회상하였다.

1920년 야나기 선생이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을 결심하게 만든 사람도 다쿠미였으며, 그리고 실제 미술관을 만드는 데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그해 초겨울 다쿠미가 아비코의 야나기 선생 자택으로 방문했을 때 두 사람 사이에 미술관 설립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여 조선민족미술관의 건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미술관 건립을 위하여 두 사람은 기금마련에 온 힘을 쏟았다. 야나기 선생은 아내 가네코의 음악회 수익금 전부를, 다쿠미는 지갑을 다 털어 부었다. 심지어 다쿠미는 어머니가 사키코 양과 결혼할 때 양복을 새로 사 입으라고 돈을 주었는데 나중에 어머니께서 “양복은 샀니?”하고 물으니, “모두 골동품이 되었어요.”라고 대답하였을 정도로 미술관에 들어갈 민예품들을 사들이는 등 그 일에 열정을 다 쏟았다. 이때의 다쿠미의 열정에 대한 이야기를 다쿠미의 저서 <조선의 소반>의 발문에서 야나기 선생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자네의 이해와 애정과 노력이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이루어 내지 못했을 걸세. 나는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귀찮은 일은 자네가 다 도맡아 주었지. 장차 여기 수집된 그런 공예품들을 보고 누군가 기뻐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무엇보다도 자네의 노력에 감사할 것이네. 어떤 물건은 고물상의 컴컴한 구석에있다가 자네의 눈에 띄기도 했지. 또 어떤 것은 산속 민가에서부터 자네 등에 업히어 멀리 운반되어 온 것이고, 어떤 것은 생활비까지 털어 사들이기도 했지. 말하자면 자네가 이 물건들을 새로 탄생시킨 셈이네.     
 
그 결과 1924년 4월 9일 경북궁안의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이 정식으로 개관하기에 이른다. 미술관을 개관한 후 1925년 4월에는 모쿠지키 불상 사진전을, 1927년 10월에는 조선의 미술공예품을, 1928년 7월에는 조선시대 도자전을 개최하는 등 매년 봄가을에 한 차례씩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이렇게 일본인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조선민족미술관’은 태평양전쟁 중에 집경당에서 근정전 복도 한쪽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1945년 일본의 패전을 맞아 일부가 훼손되어 다시 민족박물관에 보관되다가 한국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왔다.            

다쿠미의 조선민예 평론
다쿠미가 사십년을 살면서 이룬 업적가운데 또 하나는 조선민예에 대한 연구인데, 그것은 바로 세상에 많이 알려져 훌륭한 저서로 높이 평가 받고 있는 1929년에 쓴 <조선의 소반>과 1931년에 쓴 <조선도자명고> 이다. 이밖에도 다쿠미가 남긴 글로는 1922년 <시라카바> 9월호에 게재된 ‘가마터를 순례하던 어느 하루’ 1925년 <아틀리에> 4월호와 5월호 연재한 ‘가마터 순례 여행을 끝내고’ 1927년 <대조화> 12월에 실린 ‘분원요적고’ 1930년 <제국공예> 2월호에 발표된 ‘조선의 선반과 장롱류에 대하여’ 1931년 다쿠미가 죽은 뒤  <공예> 5월호에 실린 ‘조선다완’과 7월에 게재된 ‘조선요업진흥에 관한 의견’그리고 1934년 <공예> 4월호에 발표된 ‘김해’등 7편의 글이 남아 있다.
다쿠미는 <조선의 소반>에서 “올바른 공예품은 친절한 사용자의 손에서 차츰 그 특유의 아름다움을 발휘하는 것임으로 어떤 의미에서 사용자는 완성자라고도 할 수 있다.”라고 자신의 공예관을 피력하고 있으며, 그리고 “조선의 소반은 순박하고 단정한 자태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우리 일상생활에 친숙하게 봉사하고 세월과 더불어 우아한 멋을 더해 감으로 올바른 공예의 표본이라 해야 할 것이다”라고 소반에 대한 의미를 강조하였다. 특히 다쿠미의 유작인 <조선도자명고>에서는 기물의 종류에 따른 명칭, 도자기를 만드는 도구와 원료 그리고 가마터의 조사 등을 세밀하게 수록한 교과서 같은 책으로 매우 소중한 문헌이 되고 있다. 야나기 선생은 <조선도자명고> 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어떤 지은이나 많건 적건 간에 앞선 사람이 지은 저서의 도움을 받는다. 그렇지만 이 저술만큼 지은이 스스로 기획해서 만들어내는 예는 드물 것이다. 아직 아무도 생각해 내지 못했고 시도하지도 않았으며, 앞으로도 아마 해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도자기를 만든 나라사람인 조선 사람들에게서도 기대하기 힘든 저술이다. 왜냐하면 젊은 사람은 옛 그릇을 모르고 , 나이든 사람은 그릇을 아끼는 습관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일본인에게도 이와 같은 책을 기대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지은이를 제외하고는 그 어디에서도 조선의 도기에 대한 사랑과 이해, 지식과 경험 그리고 어학까지 골고루 겸비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아사카와에게 걸 맞는 일이며 또 가장 아사카와다운 일이다.

다음호에 계속


도자기를 들고있는 다쿠미. 당시 27세
다쿠미가족. 왼편부터 노리다카의 부인과 자녀, 노리다카, 어머니와 노라다카의 큰딸, 다쿠미, 다쿠미의 첫번 부인과 딸 소노에
어머니
1928년 8월, 계룡산도자기가마터에서. 왼편부터 다쿠미, 야나기, 노리다카

필자약력
1972 건국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과 졸업
1994 한국공예협동조합연합회 전무이사 취임
1998 전국공예대전 본선 심사위원
1998 전국관광기념품공모전 본선 심사위원
1999 청주공예비엔날레 기획위원
2000 한국공예문화진흥원 비상임이사
2002 우수산업디자인(GD마크) 상품선정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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