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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리뷰-김정란,정길영,이학수,윤숙정,윤재일,인현식,이지은
  • 편집부
  • 등록 2006-03-10 16:2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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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 도예전 <차茶·완碗·반般>전
2005.11.30 - 2005.12.5 갤러리 각

그 쓰임과 어울림

글 한길홍 _ 도예가, 서울산업대학교 도자문화디자인학과 교수

김정란의 첫 번째 전시가 우리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은 차茶라는 보편적 주제를 특별한 해석으로 펼친 점이다. 또 하나 사족을 달자면 그가 적잖은 작가적 연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란은 그동안 자신의 작업에 대해 오랜 고심과 실험을 통해 현대라는 특성과 흙에 대한 해석을 전제하면서 조형에 대한 다각도의 모색을 해 왔다. 특히 근년에 보여준 작업에서 그는 자연·환경·인간에 대한 복합적 관계를 상관된 의미로 해석하고 조형으로 전개하고 있다. 이는 그의 첫 번째 전시에서 펼친 작업의 귀결을 보다 진솔하게 이해하게끔 한다.

김정란은 10여년 동안 차를 마시며 차향기 속에서 생활해 옴으로서 이제 차에 대한 의미를 깊게 느끼고 그 진가와 진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전시 주제는 획연하게도 차와 찻잔 그리고 찻상의 관계를 <쓰임과 어울림>에 의해 이를 흙 작업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귀결은 그가 작가이기 전에 인간이 지니는 공예의 본능적 욕구나 충족을 위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쓰임과 어울림>은 공예의 궁극적인 요구이며 목표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김정란의 첫 번째 해법은 차茶를 마신다는 것을 자연에 근접하는 정신적 자세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두 번째 해법은 자연의 상징적 의미나 가치를 돌石의 형상에 근저함으로서 자연을 보다 가까이 수용하는 것, 다시 말해 실내로 끌어들이는 것에 작의作意를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 찻잔茶碗이라는 공예적 요소를 쓰임으로 하고 찻상茶盤이라는 자연적 요소를 물성적, 상징적, 조형적, 현대적 의미에 접목하여 조화를 찾게 함으로서 <쓰임과 어울림>의 결과를 잉태시킨 것은 당연한 귀결점을 찾은 것이다. 김정란의 이러한 모습에서 작가 스스로의 내적인 충동, 이른바 그의 내재율 속에서 만들어진 것을 작업의 결실로서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순리이며 자연스러운 행위로서 그의 작가적 역량과 인간적 면모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한다.

차를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열고, 차를 마시면서 하루를 정리하는 도예가 김정란의 첫 개인전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전달되는 평온과 질서를 느끼게 하는 따뜻한 메시지를 그 안에 담고 있다. 

 


제4회 정길영 도예전
2005.11.20 - 2005.12.20 파주 헤이리아트밸리 내 식물감각갤러리

정길영의 <방언>전을 보고

글 이세용 _ 도예가

현대 미술의 앞장에는 늘 회화나 조각과 같은 소위 파인아트fine art라 불리는 장르가 있었고 이러한 순수 미술의 개념이 도자예술이나 섬유예술 등에 도입되면서 이제는 많은 공예가들도 이러한 현대 미술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정길영은 회화과에서 그러한 현대 미술의 수업을 받았고 또 많은 전시회를 통해 그러한 그의 의지를 보여준 바 있다. 현대 미술의 흐름이 서울에 버금갈 만큼 도도한 대구 화단에서도 그는 평면 작업을 엄청나게 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세 번의 개인전은 물론이거니와 대구 독립 작가 리그전이나 일본에서 있었던 대구 현대 미술제 등을 통하여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에서 주목을 받는 작가였다. 그는 주로 모노크롬monochrome계의 대형 작업을 주로하거나 혹은 설치작업을 주로 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예술가들처럼 그의 심성에도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어서 아주 세밀한 작업- 예를 들면 바늘 끝으로 장식한 것 같은 새끼손가락만한 약2000여개의 테라코타 작업이라던가 또는 책 한 권을 몽땅 볼펜으로 새카맣게 칠하듯 그린 작업- 에도 심취했었다.
이번 4회 정길영전의 도자기 작업을 전적으로 이러한 그의 회화나 설치 작업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그가 물레를 배워 조그마한 컵을 만들고 장식하고 전시하는 과정까지 모든 예술적 행위는 그의 회화나 설치 작업의 연장선에 있음은 분명하다. 그는 늘 큰 작업에 대한 욕구를 억제하지 못하면서 아주 작은 컵을 몇 천개나 만들었으며 그 작은 컵에 민감한 청화 안료를 사용해서 0.1mm도 안되는 세필로 점을 찍고 선을 그리는 수도승 같은 작업에 그 뜨거운 여름 내내 매달렸었다. 그의 기물은 거의 같은 형태를 찾기 힘들 정도로 고유의 언어를 지니고 있으면서 묘한 통일감을 주는데 이는 그가  기물이 아닌 하나의 조형으로 그의 컵을 간주한 탓일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가 전시회 타이틀을 뭐로 할까 고민할 때 내가 불쑥 “방언”이 어떠냐고 의견을 내놓았었다. 조그마한 작품 하나하나가 마치 그가 구사하는 억센 경상도 사투리같이 탱탱거리고 있었으며 신들린 사람들이 쏟아내는 또 다른 언어처럼 신선하기도 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시 형태 역시 통념적인 도자기 작품 전시 형태가 아닌 설치작업으로 보여진 것으로 미루어 그는 아마도 도자기 영역도 그의 작업의 한 범주일 뿐이지 결코 또 다른 영역으로 간주하지 않을 듯하다. 다만, 내 욕심일지는 모르지만 도자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가능성이 무궁한 후배 도예가 한명이 탄생되기를 기쁘게 기다리고 있다.

 


이학수 전통옹기전
2005.12.14 - 2005.12.20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옹기를 닮은 옹기장이

글 윤영근 _ 전남도립 남도대학 도예산업디자인과 교수

100여평의 넓은 전시장을 가득 채운 전라도 옹기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우리옹기의 아름다움을 다시 느끼게 한다. 작품은 어른 팔로 벌린 것 보다 더 큰 옹기부터 작은 것은 찻잔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학수 옹기작품의 특징을 보면 전통에 바탕을 두면서 전통에만 머무르지 않고 작가만의 독특한 옹기형태와 아름다운 선들을 볼 수 있다.
현재 작가는 전남 보성 초입에 위치한 미력옹기를 선친으로부터 여러 대를 이어받아 운영해오고 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던 작가는 조상대대로 이어 온 가업을 그만둘 수 없기에 어려운 결단을 하고 옹기장이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필자가 7년 전에 처음 미력옹기를 방문했을 때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선친에게 전수받은 작업 방법과 정신을 묵묵히 고수하며 작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러한 작가의 고집스런 장인정신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옹기라는 입소문을 통해 전해져 지금은 10명이 넘는 직원이 부지런히 옹기를 만들어도 옹기점의 작품을 찾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항상 그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오늘보다는 내일을 위하여 끊임없이 혼신의 힘과 정열을 불사르는 이 옹기장이야말로 우리들이 진정 본받아야 할 표상이라 말하고 싶다.
이학수의 옹기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부드러움과 넉넉함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그의 성품이 옹기에 그대로 담겨져 있음을 보여준다. 유난히 문학적인 감성이 풍부한 그와 조금이라도 만나서 이야기해 본 사람이라면 넉넉한 마음과 온화한 성품으로 인해 어느새 동화되고 만다. 작가는 옹기의 소박하고 넉넉한 마음처럼 인정이 많아 주변 사람들에게 변함없는 마음을 전달하며 사는 것을 본다. 그러하기에 한때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당시 그를 아는 지인들의 성원으로 지금은 그의 표정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아볼 수 있다.
필자는 작가와 오래전에 밤늦게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작가의 생각과 꿈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의 꿈은 아주 소박하다. 우리의 것인 옹기를 아니 자기선친으로부터 전수받은 옹기를 후학들에게 전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오늘도 그 꿈을 위해서 하나하나 쌓아가고 있다. 한국의 무형문화재 옹기부문의 전수자인 그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옹기야말로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이학수는 옹기를 만들고 전시하면서 우리의 것을 알리는데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학수 옹기장이는 1년에 한두 번씩 서울의 유수한 화랑에서 초대전으로 전시를 가져왔으며 앞으로도 계획되어 있다. 필자는 그의 끝없이 옹기를 빚어내고 전시하는 행진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문화를 풍성하게 보듬어가고 가꾸어가는 선구자로 자리매김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윤숙정 작품전
2005.12.7 - 2005.12.13 통인화랑

윤숙정의 작품에는
사랑의 강이 흐른다

글 김웅배 _ 목포대학교 총장, 문학박사

도자기가 생활용기로 쓰기 위해 만들어지기 시작했겠지만 그 하나하나에 작가의 정성과 아이디어와 예술혼이 깃들어 있고 개성적 기교와 방법으로 빚어지기 때문에 도자기는 예술이 되고 문화재가 된다.
근래에 와서 도자기가 원래의 기능성보다 작가정신의 표현수단으로, 즉 예술적 매체로 구현되었을 때, 도자기는 회화나 조각과 같이 도예라고 명명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소설가나 시인이 일정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 듯 윤숙정은 일정한 테마를 탁월한 솜씨로 빚어내고 있다.

어느 날 나는 그의 공방에 들러 다 빚어진 초벌구이만한 작품들을 미리 엿볼 수 있었다. 우연히 곧 시집갈 남의 집 큰 애기의 몸매를 엿 본 것 같은 미안함도 있었지만 호기심 또한 발동하였다.
이번에 전시회를 통해 보여준 윤숙정의 도예작품은 그 하나하나가 동화책이었고 동화책 속의 삽화였다. 그런데 이것들의 주제나 내용이 따로따로가 아니요 시리즈로 엮어져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의 강이요 사랑의 동산이었다. 이야기가 어머니의 사랑 속에 동심으로 피어올랐고 어머니의 사랑의 동산과 강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향토미 속에 다양하고 따스하게 형상화 되어 있었다.
해가 지는 지도 모르고 숨박꼭질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서는 저녁을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고 걸레질 하고 있는 어머니를 밀거나 타고 노는 아이들에게서는 어머니가 놀이동산이라는 것을 절감 할 수 있다. 또 두개의 지팡이로 몸을 지탱하면서도 강아지 같은 손자들을 키우는 마루할머니의 모습은 충격으로 받아 들여졌다. 이 모든 것이 어머니의 자애로운 사랑 속에 피어난 아이들의 놀이요 삶의 유형이다.
한 가정의 구심점이었고 사랑의 태양이었던 개체적 어머니는 결국 영혼의 깃털로 승천하게 된다. 그러나 어머니와 어머니의 사랑은 사라지지 않고 뒷동산이 되었다가 나무로 되었다가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어머니의 젓가슴은 동산이 되고 어머니의 사랑은 강물이 되어 흐른다. 가톨릭 교인인 그의 심저에 불교적 윤회 사상과 인연설이 깃들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등을 타고 놀 듯 뒷동산에 올라 소리를 지르고 강물에서 동심의 세계를 꽃 피운다. 이것은 자식들을 끝없이 사랑하면서 위로 끌어올리려는 어머니의 염원이요 기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이들의 마음에 나무처럼 희망한 수액이 흐르는 것도 나무들 곁에서 마음껏 노는 것도 어머니는 이미 나무요 나무는 곧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숭고한 사랑은 연리지로 이어지고 하늘을 향해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한다.

나는 지금까지 수십 점의 도예작품이 하나의 일관된 주제아래 다양한 모습으로 구연된 것은 처음 보았다. 그것은 작가의 상상력의 폭과 예술적 안목의 넓이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과 진실한 어머니의 자애로움을 흙 맛에 손맛을 가해 불로 완성시킨 이야기 있는 도예작품전이었다.                                                   

 

윤재일 <연탄재 연탄화煉炭再 煉炭花>전
2005.11.19 - 2005.12.3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추억의 공감

글 박찬응 _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관장

무릇 도예가는 가마를 신성시 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연탄재는 물론이고 스폰지나 걸레 어디서 굴러먹던 돌멩이도 그의 가마에 들어가는 행운을 맞는다. 녹아버리거나 타버리거나 부서져버리거나 하지만 실패를 거듭하며 끝내 자신의 소재로 개발해 내고 만다.
도자기 가마 속에 흙으로 만든 그릇이 아닌 연탄재가 타고 있다고 생각하니 묘한 느낌이 든다. 연탄이라는 특수한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윤재일은 특이하다. 연탄재와의 인연을 물어보니 가마에 도자기를 구울 때 빈 공간이 아까워 여러가지 이것 저것을 넣고 실험을 하는 중 발견한 소재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검은 연탄이 활활 타올라 제 수명을 다하면 곧바로 버려진다. 그 버려진 연탄재 수백장이 그의 가마 속에서 다시 타올라 단련되고 강화되고 그의 손에서 정련精練되어 새 생명을 얻는다.
새 생명을 얻은 그의 연탄재를 통해 추억에 잠기기도 한다. 집집 부엌마다 연탄아궁이가 없는 집이 없었다. 돌이켜 보면 1990년 나의 신혼집도 연탄보일러로 된 집이었고 서민형 주공아파트의 대부분도 연탄보일러였다. 박카스나 동치미국물을 약 삼아 연탄가스와의 싸움을 견뎌냈던 시절이었다. 80년대 화실의 연탄난로는 연탄이 6장 들어가는 커다란 것이었는데 매일매일 쏟아지는 연탄재를 다 버리지 못해 한쪽 벽면 가득 쌓아두었던 기억이 난다. 연탄재 집어 들고 격파하기, 이소룡 흉내내며 걷어차기, 연탄불 빌리기, 새끼줄에 엮인 연탄사기, 연탄재 섞어서 눈싸움하기, 미끄러운 골목길에 연탄재 뿌리기, 수많은 보편적인 사연들이 중첩되거나 토막되어, 혹은 파노라마된다
윤재일이 쌓아올린 연탄재기둥을 보면서 문득 ‘가우디Antonio Gaudi’의 ‘성가족 교회’가 떠올려진다. 또한 연탄과 연탄사이에 이끼가 끼고 나무나 풀이 자라는걸 보며 일반 화분에 자라는 분재나 화초와는 전혀 다른 멋과 맛을 느끼게 할뿐 아니라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 받기도 한다. 전시장 여기 저기 연탄재를 쌓아두거나 연탄재를 새끼줄로 묶어 두기도 하고 연탄구멍에 연필을 꽂아두기도 하고, 물 담긴 그릇 속에 들어앉아 수반이 되기도 하고 조명등이 되기도 하는 그의 연탄재 설치작품을 보면서 그만의 독특한 실험정신을 느꼈다. 또한 생활 속에서 예술을 꽃피우려는 그만의 독특한 의지와 정렬적인 예술혼이 느껴졌다.
윤재일, 그가 연탄재를 통해 이루려는 소망과 우리들의 소망들이 어우러지고 나의 기억과 우리들의 기억들이 다시 생활 속에서 소통하고 꽃피게 되기를 다시 한번 기대해본다.
이제는 다소 진부해진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를 적어보며 글을 마친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느냐”

 

인현식 도예전 MUSIC & RHYTHM
2005.12.14 - 2005.12.20 통인화랑

음악 이미지를 담은
가방

글 민은주 _ 통인화랑 큐레이터

현대미술에 있어서 도자조형작품은 순수한 미술로 평가되지 못하고, 공예적인 관점에서 판단이 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현재까지 도자기가 쓰임을 위주로 발전을 해 왔으며 제작 기술에 그 중요성을 두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도자예술이 현대미술이 요구하는 형태Form와 내용Concept을 충분히 포함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도자예술은 다른 미술분야에 비해, 공예미술이 요구하는 기능성과 조형성, 기술력과 표현력에서는 뛰어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으나, 현대미술이 요구하는 배경과 과정, 내용과 개념에 있어서는 많은 작품들이 충분한 설득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현식의 작품은 음악적 이미지의 시각적 표현이라는 내용Concept과, 가방 모양의 도자조형이라는 형태Form를 가지고 있으므로, 현대미술이 요구하는 두 가지 요소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언어가 사회적인 약속에 의한 소통의 방법이라고 한다면, 음악과 미술은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 개인적이고 제약 없는 소통의 방법이라는 데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인현식은 이러한 공통점과 연관성을 이용하여, 음악이라는 추상적 이미지와 가방이라는 공간적인 이미지를 결합하는 시도를 통해 도자조형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는 음악을 듣고 느끼는 감정을 선으로 스케치한 다음에, 그것을 선과 점으로 이루어진 기호로 표현한 후, 마치 오르골에 음을 새기듯 실린더 형태에 그 기호를 조각하여 표현하였다. 이러한 기호는 음악이 가지는 볼륨감과 긴장감을 보여주며, 반복적이면서도 변화가 있는 리듬을 느끼게 해 준다.
가방이란 형태는 도자예술의 기본이 되는 기器의 발전된 모습이며, 무언가를 담든다는 기본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작가는 ‘시간과 공간을 담든다는 의미로 시·청각을 규합해 음악적 이미지를 3차원적 조형으로 표현하는데 있어 좋은 형태’라고 말하고 있다. 색채에 있어서도, 이번 작품들은 백자소지를 이용한 백색의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색이 갖고 있는 고유의 상징성을 이용해, 음악이 갖고 있는 속도와 무게 등을, 색이 갖고 있는 채도와 명도를 이용하여 표현하였으며, 이러한 시도들은 음악과 미술의 결합을 위한 작가의 꾸준한 연구와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전시는 그간 작가의 연구 결과를 보여주는 기회로써, 청각예술인 음악과 시각예술인 미술의 밀접성을 보여주며, 작업을 통해 음악적 이미지의 시각적 표현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러한 결합을 도자 작품으로 표현하여 도자예술의 보다 넓은 예술영역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현대미술의 한 영역으로 평가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지은 도예전
2005.11.30 - 2005.12.6 인사아트센터

표정을 통한
커뮤니케이션

글 김진아 _ 홍익대학교 도예연구센터 연구원

처음 보는 사람의 심리상태나 인격을 판단할 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 사람의 얼굴 표정이다. 신비의 미소를 지녔다는 모나리자의 얼굴 표정에는 83%의 행복함 외에도 싫어함, 두려움, 화냄의 감정이 복합되어 있다는 것을 최근 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다. 물론 이 결과는 컴퓨터에 입력된 수치에 의해 나타난 결과이지만 같은 얼굴, 같은 표정이라도 보는 이에 따라 느껴지는 감정이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라는 전시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지은의 전시 주제 역시 얼굴이다. 주제에 걸맞게 전시장 벽면에는 다양한 표정을 지닌 얼굴들이 가득 걸려 있었다. 그러나 여느 도예전시와는 조금 다르다고 느껴졌던 것은 벽에 걸린 작품 옆에 가득 메워진 글들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작품으로 가득 채워도 아쉬울 것 같은 전시도록에도 글이 잔뜩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옆에 제시되어 있는 얼굴 표정에 대한 관객들의 짧은 감상인 듯 했다. 과연 작가는 이 작품들과 실명이 기입된 한 마디의 글들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었을까.   
이지은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선상에 있는 표정에 주목하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그가 제작한 얼굴들은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는 것 같으나 셀 수 없이 많은 생각을 반복하는 찰나의 표정, 즉 무엇인가에 몰두하여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게 되면 나타나게 되는 무아지경의 표정을 띠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의식의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막 건너간, 가공되지 않은 얼굴의 순수한 이미지를 추구하는 작가의 의도가 작품에 다분히 묻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수한 이미지는 어느 순간 낯선 모습으로 다가와 작가를 혼란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이지은은 작품에서 구체적이고 익숙한 형태들을 점차 배제시켰고, 그 결과 점, 선, 면 같은 조형의 최소 단위만 이용하여 표정을 구성하고 있다. 평면적이면서도 기하학적인 얼굴의 형태와 하나 혹은 두 개의 선과 점만으로 표현된 표정들은 지극히 절제적인 작가의 성격을 잘 반영하는 조형언어로 읽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착이라 할 만큼 절제된 표현들은 여러 가지 얼굴의 표정들을 나타내기에 오히려 방해요소가 되고 있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지은은 전시기획 단계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작품의 일부를 공개하였고, 제시된 얼굴 표정에 대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형용한 표현들을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감상들은 자칫 단순해질 수 있었던 작품에 다양한 표정들을 살릴 수 있는 장치로 작용하여 전시 내용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이처럼 이지은의 작품의 발단은 다소 원초적이고 철저히 개인적인 것에서 시작하고 있지만 그 완성은 다원적이고 사회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작가는 도록에 가득 쓰인 글들과 벽에 걸린 얼굴 모양의 작품들은 통해 자신과 사회를 연결하는 긴밀한 장치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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