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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믹스 원로 초대석 - 지응업 공학박사
  • 편집부
  • 등록 2006-03-14 17:53:16
  • 수정 2010-01-09 11:4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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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믹스 원로 초대석

지응업 공학박사

우리나라 세라믹 산업 부흥의 바람을 일으킨 장본인
“요업이 다시 활기를 찾기 위해서는 요업의 본질에 바탕을 두고 연구하고 신제품을 개발해 나가야 합니다”
국내 최초로 세라믹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지응업 박사는 우리나라 세라믹 산업의 재부흥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 비해 다소 침체된 세라믹 업계의 활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은 세라미스트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지응업 박사에게는 좀 더 각별하다. 이는 지 박사가 우리나라 세라믹 산업의 부흥을 추구했던 마산 요업센터를 설립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60년대 초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한양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 요업과가 생기는 등 당시는 우리나라 요업산업이 부흥의 움직임을 보일 때였습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제대로 된 요업센터의 설립을 추진했고 제가 그 일을 맡게 된 것입니다”

국내 최초로 세라믹공학 박사학위 취득, 세라믹 교과서도 채택
지응업 박사가 세라믹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51년 부산에서 대학을 졸업하게 되면서였다. 서울대 화공과에 재학중이던 지 박사는 6.25로 인해 부산에서 대학을 다니게 되었고, 그 당시 부산에 위치한 국내 최대 도자기공장이었던 대한도기에서 요업 관련 실험을 하며 대학을 마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졸업과 함께 부산대 화공과 교수로 취임을 했다. 하지만 지 박사는 요업을 모르면서 요업을 가르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정식 공부를 위해 57년 미국으로의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미국 뉴저지 Rutgers 대학에서 국내 처음으로 세라믹 박사학위를 받은 지응업 박사는 61년 한양대 요업과 교수로 부임하여 당시 2학년이던 요업과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정말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 때 저에게 배우던 학생들은 저를 무서운 선생님으로 기억할 겁니다”
지응업 박사는 한양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처음으로 세라믹 교과서를 채택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교과서가 제대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MIT 대학 Kingly박사의 Introduction to Ceramics와 Chemistry and Silica 등을 교과서로 채택하여 학생들에게 소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교육을 시킨 것입니다”
지응업 박사의 한양대 재임은 65년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으로 인해 5년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지 박사에게 고려청자를 재현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 세라믹 산업을 부흥시킬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뜻에 따라 지응업 박사는 마산에 요업센터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요업센터는 요업연구소와 공장으로 이루어진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세라믹산업 발전의 기반이 된 곳이다.
박정희 대통령 요청으로 요업센터 건립, 우리나라 세라믹 산업의 기반 마련 
“공장다운 공장이 없어 타일, 위생도기 등을 대부분 수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업센터에 최신식 공장을 짓고 타일, 위생도기를 국산화했던 것입니다. 그 공장에서 생산한 타일을 당시 건설중이던 조선호텔에 시공하기도 했습니다”
요업센터는 이후 공장은 대림요업에 불하되었으며 연구소는 현재의 요업기술원의 전신인 마산 도자기시험소가 되었다고 한다. 요업센터 설립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마친 지응업 박사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갔다. 70년 인하대학교로 부임한 지 박사는 요업공학과를 만들었으며 7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후 77년부터는 아주대학교에서 행정관련 업무를 담당하며 대학원장과 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대우그룹에서 아주대학교를 맡으면서 제게 요청을 해왔습니다. 이상하게 청와대나 대학교로 자주 불려다닌 것 같습니다. 제가 한국식, 일본식, 미국식 교육을 전부 받아 경험이 많기도 했고 당시엔 대학 행정을 담당할 사람이 부족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고 하는 지 박사는 그의 말대로 90년에는 다시 동양공업전문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동양공전에서는 정년퇴임 때까지 학장을 맡았다.
지 박사는 96년 70세의 연세로 정년퇴임을 한 이후에는 현장에서의 직접적인 활동보다는 글쓰기 등을 주로 하며 지내고 있다. 
 
세라믹의 재부흥 위해서는 세라믹의 근본 추구해야…
우리나라 세라믹 부흥의 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으로서 지응업 박사는 세라믹을 다시 반석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그 방안에 대해서도 늘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지금 요업센터를 다시 지을 수도 없습니다. 저는 대학이 세라믹발전에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라믹의 근본을 추구하며 거기서 우리가 원하는 신제품을 만들고 그 제품을 만드는 이론을 확립하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가 필요할 것입니다. 세라믹이 활기를 되찾기 위해서는 세라미스트들이 정말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우리나라 세라믹의 재부흥을 바라고 있는 지응업 박사가 후배 세라미스트들에게 주고 싶은 이야기이다.
<박미선 기자> 

사진1 지응업 박사
사진2 요업센터 건립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설명하고 있는 지응업 박사
사진3 요업센터 건립을 주도한 지응업 박사
사진4 해외 관계자들과 요업센터 관련 계약을 맺고 있다

지응업 박사 약력
1952년 서울대학교 화공과 졸업
1959년 미국 Rutgers 대학교 요업공학 석사
1961년 미국 Rutgers 대학교 요업공학 박사
1955년 부산대학교 전임강사
1961년 한양대학교 요업과 교수
1965년 금속 연료 종합연구소 소장
1966년 요업센타 요업연구소 소장, 상무이사, 전무이사
1970년 인하대학교 교수, 교무처장, 공과대학 학장
1977년 아주대학교 교수, 부학장, 학장서리, 총장대리, 대학원장
1990년 동양공업전문대학 학장
1964년 한국요업학회 전무이사
1964년 한국표준심의회 위원
1965년 대한화학회 간사
1975년 문교부 대학평가위원
1976년 문교부 고등교육 정책심의위원
1976년 한국요업학회 회장
1978년 대한화학회 간사장
1978년 공학교육개발위원회 위원장
1981년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
1982년 사립공과대학 평가위원회 위원장
1983년 대학평가위원회 위원장
1985년 IBRD 평가위원회 위원장
1985년 한국정밀요업진흥협의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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