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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 <다쿠미>의 묘소를 참배하고서(2)
  • 편집부
  • 등록 2006-04-21 17:2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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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 <다쿠미>의 묘소를 참배하고서(2)

글+사진 문옥배 _ 한국공예협동조합연합회 전무이사

한참 동안 이리저리 둘러보고 돌아서려는 내 마음 어딘가에 서운한 감정이 나를 불러 세웠다. 한국의 산림청 산하 임업시험장(현재 국립산림과학원)의 직원들이나 다쿠미의 출생지인 일본의 추모객들은 묘소를 관리하고 다녀간 흔적이 많은데, 한국의 공예인들이나 도예인들의 흔적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한국의 민예를 사랑하고 「조선의 도자명고」를 저술한 기록도 너무도 뚜렷이 남아 있는데, 왜 우리의 공예와 도자기를 가꾸고 대를 이어가는 우리 공예인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사실은 본인도 몇 년 전까지는 관심 밖이어서 그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고 살아왔었다. 그러기에 ‘노리다카’나 ‘다쿠미’라는 이름을 가끔은 들어오면서 그 사람은 조선의 도자기를 좋아한 일본사람 중 하나일 거라는 정도로 지나치고 말았다.
이렇듯 그간 나 같은 사람만 있어서 모두 무심한 것인가. ‘그래도 그렇지, 한국의 그 많은 공예인, 도예인들 중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사람이 많지 않다면 이것은 정말이지 말이 아니다. 아마도 내가 몰라서 그렇지, 사실은 여기를 다녀간 공예인들도 무척 많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달랬다.  

산을 내려와 관리소에 도착하여 친절히 안내해 준 관리소장님께 고마움을 표하려고 집무실에 잠깐 들렀더니, 관리소장께서 그분은 상당히 유명하신 분인가 보다고 말했다. 일본의 그분 고향 시장인가 하는 분도 오시고, 많은 일본인들이 늘 찾아온다고 했다. 그러면서 최근에 다녀간 일본 사람들 중에 어느 여자 분께서 이렇게 편지도 보내왔다고 보여주었다. 그 편지는 지난 10월 14일에 다쿠미의 묘지를 다녀간 일본인 쓰카다 케이코塚田惠子라는 여자 분이었다. 묘지를 친절히 안내해 준 사무소 직원들에 대한 감사의 편지였다.  한글로 쓰인 그 편지의 내용 속에는 이런 말이 들어 있었다.

‘저는 큰 하얀 도자기가 옆에 설치된 무덤을 보면서 아카와 노리다카, 다쿠미淺川伯敎.巧 형제가 조선에서 틀림없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묘소를 안내해 준 관리소 직원들과 택시기사, 그리고 산책길에서 만난 한국인들에게서 그 옛날 아사카와 형제가 조선에 살면서 가까이했던 조선 사람들의 친절하고도 다정한 인간미를 그녀도 그대로 느꼈다는 뜻일 것이다. 자기도 조선과 조선 사람들을 좋아하고 조선에 살면서 죽어서도 한줌 조선의 흙이 되고자 했던 다쿠미의 깊은 뜻을 충분히 공감하였다는 말 같기도 했다. 
이 감사의 편지를 쓴 일본인에게 필자도 감사의 뜻을 서신으로 전해 보았다. 또한 그것과 함께 궁금한 것 몇 가지를 물었다. 그랬더니 바로 회신이 왔다. 그분은 1942년생이며 고등학교 강사로 일하고 있는 주부라고 하였다. 다쿠미의 출생지인 야마나시현 다카네정에는 <아사카와노리다카,다쿠미 형제자료관>이 있는데 지난 9월에 그곳을 다녀왔다고 했다. 거기에는 아사카와 형제가 남긴 많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어 그 자료관을 통해서 입수한 책이라며 소설 《백자의 나라에 살다》(1994년 에미야 다카유키가 지은 「백자白磁의 인人」을 2002년 한글판으로 발행한 것임)라는 책을 한 권 보내왔다. 그리고 이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하기로 한 영화가 영화감독의 사정으로 지금 중단 중에 있다는 소식도 전했다. 참으로 자상하고 고마운 답신이었다.

그 후 필자는 다쿠미 묘소를 다녀온 지 12일이 지나서 다시 또 그를 찾았다. 그때는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헌화와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게  또 무슨 조화인가. 멀쩡하던 날씨가 다쿠미의 묘소에 다다르니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석물들을 더 자세히 관찰하고서 사진을 찍으려 하니 눈발이 더욱 거세었다. 눈발이 조금 뜸한 틈을 타서 사진을 찍고 서둘러 산을 내려와 망우리 고갯길로 나서니 그곳에는 눈은 커녕 빗방울 하나도 뿌린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다쿠미씨가 내게 무척 서운했던 것일까. 왜 이리 늦게 나를 찾아와서 호들갑이냐고 호통을 친 것 같기도 했다.

어찌됐든 나는 여기서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다쿠미씨가 그토록 일본인들의 추앙을 받는 이유는 그가 임업시험장에 근무하면서 종묘사업에 많은 업적을 남겨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일본에서 농림학교를 19세에 졸업 하고 5년 정도 오타테 영림서에서 근무했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24세에 한국에 건너와 조선총독부 농상무부 산림과의 평범한 임업기사로 공직에 있었다. 그곳에서「잣나무종자의 노천매장 발아 촉진법」(후일 높은 평가를 받았음) 개발 등 양묘와 조림사업에 관한 글을 많이 남기긴 하였으나, 이런 일로 인해서는 그다지 그를 기릴 만한 업적으로 평가되지는 않아 보인다.
분명한 것은 그의 업적이 기념 비문에 써있는 대로 조선의 민예를 사랑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에서 기인한 것 같다. 특히 공예 이론의 대가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 1889-1961와 교류하면서 함께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우고, 또 그의 형 노리다카와 함께 조선의 팔도를 누비며 도요지를 답사하고 발굴하여 이를 보존하고자 했음이다. 「조선의 소반」과 「조선도자명고」라는 자료를 남기는 등 조선의 민예와 도자기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긴 것에 대해 더 많은 평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거기다가 그의 온화한 성품과 숭고한 인간애를 기리며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그의 갑작스런 주검 앞에 슬퍼하며 애도하였다고 하는 데에 그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없다. 조선총독부 산하 임업시험장의 판임관인 기수에 불과했던 그가 조선과 조선 사람을 사랑하며 조선의 공예와 도자기에 바친 생애와 끈끈한 인간애가 41살의 거룩한 죽음으로 승화되어 일본에 알려짐으로써 위대한 일본인, 일본인이 본 받아야할 사람으로 칭송되었기 때문일 게다.

그러기에 일본에서는 다쿠미에 대한 추모가 그칠 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다쿠미를 추모하는 수많은 글과 논문, 소설, 희곡, 연극, 음악공연, 좌담회, 강연회, 중학교 국어 교과서(인간의 가치), 신문과 TV방송의 특집 등이 이를 말해준다. 또한 다쿠미를 찾는 여행, 추모 모임, 기념 사업회, 성묘단, 다쿠미 자료관, 심지어는 손자의 이름을 다쿠미로, 그리고 다쿠미 공예점에 이르기까지 마치 ‘다쿠미’ 신드롬에 빠진 것처럼 일본에서는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소설 「백자白磁의 인人」의 저자인 에미야 다카유키는 그의 소설 서문에 ‘한국의 독자 여러분께’라는 글에서 이렇게 일본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저는 아사카와 다쿠미야말로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한국에서 산 일본인 중에서 “우리들은 아사카와 다쿠미를 가졌다!”라고 한국 국민에게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의 업적에 대하여 가장 감사하며 그의 유덕을 기려야 할 사람은 일본인들보다도 한국인이어야 하며, 그중에서도 도예인을 중심으로 한 공예인들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최근에 발간된 「조선의 흙이 되다. 아사카와 다쿠미 평전」(다카사키 소지 지음 / 김순희 옮김 / 2005 효형출판)을 비롯하여 소설 「백자의 나라에 살다」또는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등 여러 곳에서 그의 많은 활동과 업적, 그리고 민예에 대한 사랑이 모두 조선의 도자기에서 시발되었음을 볼 수 있다.  

다쿠미의 묘소에는 우리 공예인들의 손으로 만든 기념비도 반드시 하나쯤은 세워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우리 공예인들 중에 누군가가 지금 그런 일을 추진 중에 있다면 매우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쿠미가 아니었으면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도자기의 명칭들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많은 도예가들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다쿠미가 지은 「조선의 도자명고」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과거가 아무런 아쉬움도 없이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오늘날, 만약 이 저술이 10년만 늦었더라도 여기 모아져 기록된 명칭의 수는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지은이는 잃어버리게 될 인간의 기억들을 교묘하게 보완해 주었다. 즉 묻혀버릴 뻔한 진리를 사라지지 않는 문자로 담아둔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과 후대의 사람들로부터 감사를 받아야 할 저술이다.’

그렇다. 이런 그의 저술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그에게 감사를 해야 한다. 공예인들의 손으로 기념비가 세워지기를 바라는 필자의 바램이 꼭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따뜻한 봄날 다시 또 찾아뵈올 것을 다짐하면서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으로 언덕을 내려왔다. 

필자는 지난해 12월 2일 공주에 갔던 길에 공주민속박물관장이자 다쿠미가 쓴 「조선의 소반·조선도자명고」를 옮겨 쓰신 심우성 선생님을 찾아 뵙고 우리 국내에 결성되어 있는 다쿠미의 추도 모임에 대해서 물었다. 그 모임에 공예인들이 얼마나 참여하고 있는지를 물으니, 요즈음엔 거의 보기가 힘들 정도라 잘 모르니 자세히 알고 싶으면 「한일전통문화교류협회」 조만제 회장께 물어보라고 연락처를 가르쳐 주었다.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조회장님께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분에게서도 별로 시원스런 답변을 들을 수가 없어서 매우 서운한 감이 들었다. 결국 다쿠미는 우리 공예인들의 가슴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인가. 가슴이 답답하고 왠지 써늘해진 느낌이다.
일본군 앞에서도 일본인이기를 거부하고 조선 사람 행세를 하며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고 조선인으로 아름답게 살다간 일본인 다쿠미가 이렇듯 나의 가슴에 감동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일제 암흑기에 일본인의 폭정과 탄압 앞에도 무릎을 꿇지 않고 대항했었다. 그러나 다쿠미의 위대한 생애와 젊은 주검을 아는 사람은 스스로 찾아가 무릎을 꿇는다. 이렇게 한국인들과 많은 일본인들이 그의 무덤을 찾아와 무릎을 꿇고 있음은 아베 요시시게阿倍能成 1883-1966, 경성제국대학 교수가 다쿠미가 타계한 후 경성일보에 기고한 글 「아사카와 다쿠미를 애도 한다」(1934-1947년까지 일본의 중학교 교과서에 ‘인간의 가치’로 실린 글)에서 나타난 다쿠미의 인간성이 모두에게 감동을 주고, 또 그에 대한 평가가 그 만큼 올바른 인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4월 2일, 다쿠미의 추도일에는 다시금 그의 묘소를 찾아가 마음으로부터의 존경과 감사를 드리고, 우리들의 편협한 심성에 용서를 구하고 싶다.


다쿠미의 묘
약수터쪽에서 묘를 향해 오르는 길
묘지 옆에 세워진 조형석물

필자약력
1972 건국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과 졸업
1994 한국공예협동조합연합회 전무이사 취임
1998 전국공예대전 본선 심사위원
1998 전국관광기념품공모전 본선 심사위원
1999 청주공예비엔날레 기획위원
2000 한국공예문화진흥원 비상임이사
2002 우수산업디자인(GD마크) 상품선정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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