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추천하는 작가
무토撫土 전성근, 흙의 숨결을 읽어내다
글 서정걸 _ 세계도자기엑스포 도자연구지원센터장
전성근은 백자투각작품으로 부각된 도예가다. 그의 작품들은 눈부신 솜씨를 보여준다. 정교하고 치밀하고 완벽하다. 그가 개인전을 연다고 한다.(10.23 ~ 10.28, 성북동 갤러리) 그의 작품세계가 어디로부터 연유되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소개한다.
전성근. 그와 한잔 할 때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의 맑은 눈 때문이다. 흔히 재주 있는 사람들의 눈은 날카롭거나 차가웠다. 그 수더분하고 털털한 성격에서 어떻게 저토록 치밀하고 정교한 작업이 나온단 말인가.
그의 작품에서 나는 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가끔 마신 술 한 잔 덕분이다. 그와는 이해관계로 술을 마신 적이 없다. 그래서 그 사람을 조금 들여다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작품엔 그것을 만든 사람의 성품이 담겨있게 마련이다. 예리하고 복잡한 선과 면으로 되어 있음에도, 그의 작품은 순하다. 날카로움에 대한 거부감이 많은 나에게 그의 작품이 순한 모습으로 비치는 것을 보면, 그가 선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고고한 예술의 경지를 추구하는 양 꾸며 말하지 않고, 자신의 재주를 자만하지도 않는다. 흙 맛이 좋고, 깎는 느낌에서 기쁨을 맛보고, 흙이 그를 속이지 않으니 그 속에 파묻혀 산다.
때때로 흙은 냉혹하다. 자연(흙)의 이치(성질)를 거슬리면 어김없이 깨지거나 갈라져 버린다. 투각이 그래서 어렵다. 백자의 경우엔 더 어렵다. 흙이 가지고 있는 미세한 결들을,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조직을 마음으로 읽어내지 못하면 실패다. 어김없다. 그는 도자기를 만들기 전에 목공예를 했다. 나무는 흙보다 딱딱하다. 딱딱한 대신 나무는 자신의 구조를 보여준다. 나무의 결을 보고 칼날의 방향을 결정하면 된다. 흙은 부드럽다. 부드러움은 곧 수월함이 될 것 같지만, 훨씬 까다롭다. 그 속마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음으로 결을 읽어야 한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 둔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재주가 밋밋하면 둔해지기 십상이다. 흙 작업을 통해 만들어지는 도자기는 자칫 둔해지기 쉽다. 흙으로 빚은 형태 위에 유약 층이 형성되면, 날렵한 맛이 사라지게 되니 도자기의 경우는 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형태 자체가 둔한 경우도 많다. 둔하다는 것은 엉성하다는 말이고, 밀도가 떨어진다는 의미다.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말도 된다. 재주가 부족하면 밀도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재주는 선천적인 면도 있지만, 수련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다. 거기에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된다. 전성근의 작품들은 완성도가 아주 높다. 그 완성도 때문에 그의 작품은 눈에 띈다. 그 완성도는 그의 선천적 재주와 기질에 기인하지만, 얼마나 많은 후천적 노력이 가해졌는가를 보여준다.
그의 작업은 투각이라기보다는 조각이라 해야 맞다.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투각에 그치지 않는다. 정교한 칼질이 도자기 전면에 퍼져 있다. 그 세밀한 완성도는 면의 크기와 형태을 가리지 않고 고르다. 입체감이 여타의 투각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크다.
전성근의 작품을 평가할 때 나는 역사적 관점에서 생각해본다. 역사적 관점이라 해서 대단하고 거창하게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투각 기법은 가야 토기에서도 보이고, 고려시대 청자나 조선시대 백자에서도 흔히 사용되던 기법이다. 그러나 전성근의 투각 기법은 본질적으로 도자기의 투각전통과 차이를 보인다. 감각의 차이다. 그는 나무를 통해서 조각을 배웠다. 나무로 표현되던 조각의 전통은 투각과는 다른 갈래에서 발전해왔다. 우리가 옛 사찰들에서 보는 목각들에 담긴 전통적 미감은 도자기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재료에서 오는 느낌의 차이도 있지만, 조각적 기법에서도 차이를 느낀다. 전성근은 그러한 목공예적 조각술을 흙으로 가져왔다. 애초에 배움이 그러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따라서 그의 투각작품들을 보면, 전통 목각에서 자주 활용되었던 소재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응용으로 출발했겠지만, 이제는 도자기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룸으로써, 얼른 그것을 느낄 수 없을 뿐이다. 전통 목각의 세계를 도자에 접목시킨 것이다. 도자의 투각에서는 칼맛이 유약 밑으로 숨어버렸는데, 그의 투각은 그것을 극복하고 있다. 도자 투각의 기법의 확장이란 측면에서 중요한 것이다.
“귀신같은 솜씨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디자이너인 암브로치오 뽀찌는 전성근의 작업광경을 보고 놀라워했다. 2003년 세계도자기비엔날레 워크샵에 초대되었던 그는 워크샵 내내 전성근의 훌륭한 솜씨가 예술적 꽃을 피우기가 어려운 환경에 있다는 것을 아쉬워했다. 저런 솜씨를 지닌 작가가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언과 경험을 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했다.
전성근의 완벽한 솜씨에 뭔가 보태져야 한다는 말로 나는 이해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기술적 완벽함에서 오는 부족함일 것이다. 완벽함이란 ‘더 채울 것이 없는 상태’를 이른다. 그러나 예술의 세계에선 그것이 최상을 의미하진 않는다. 비움의 경지가 더해져야 하는게 아닐까? 비움은 작품에 여유를 부여한다. 여유가 생기면, 보는 사람의 감정이 훨씬 작품과 가까워질 수 있다. 여백은 채워진 것들을 더욱 값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 조각이 가해지지 않은 부분도 중요한 것이다. 뽀찌가 말한 것은 그 솜씨가 투각과 조각에만 집중되지 말고, 작품 전체에 훨씬 더 큰 생명력을 부여하게 될 때까지 노력하란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기법들은 더 발전될 수 있고, 그 솜씨는 더 다양하게 응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필자 서정걸은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중앙일보사 월간미술 기자,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큐레이터를 역임했으며, 1994년부터 경희대 중앙대 세종대 등에서 미술사와 미술이론을 강의하면서 전시기획과 미술비평활동을 해왔다. 2001년 세계도자기엑스포 조직위원회 전시부장, 비엔날레 운영부장을 거쳐 도자연구지원센터 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 더 많은 사진은 월간도예를 참조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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