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도전 2002. 12. 4~12. 15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제1전시실
불의 기둥과 구원의 메시지
글/박용숙 미술평론가
유홍도의 이번 전시 주제는 ‘불의 기둥’이다. 그는 등잔의 이미지를 서사적인 환유로 교환하면서 우리에게 도예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준다. 엄밀히 말해서 도예가 연극이나 문학의 기능을 따라갈 수는 없다고 해야할 것이고 도예는 도예의 길이 있다는 사실을 작가가 모를 까닭이 없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연극이나 문학의 영역을 넘보며 도예의 표현 가능성을 넓혀나가는 대담한 실험을 해 보이고 있다. 이런 점은 그의 상상력이 세계 최초의 서사시로 알려진 고대 바빌로니아의 전설적인 영웅 ‘길가메쉬의 이야기’를 끌어들였다는 사실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영웅 길가메쉬는 인간세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는 천상의 신들이 지배하는 낡은 질서를 타파하기 위해 일어선다. 신들은 그를 죽이기 위해 여러 계략을 쓰지만 영웅은 이를 물리친다. 오만 방자한 여신 아난나의 유혹도 뿌리쳤으며 천계가 내려보낸 불을 토하는 수소마저 쳐죽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역시 영웅은 단명한다는 징크스를 깨지 못하고 어이없게 죽어간다. 유홍도의 ‘불의 기둥에서 기둥이 온통 용의 이미지로 장식되는 것도 서사시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는 다고 보고 싶다. 물론 작가는 자신의 영감을 고구려시대의 고분인 쌍영총에 용이 새겨진 돌기둥에서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불의 기둥’은 주제에서만이 아니라 구성에 있어서도 특별하다. 작품 구성은 전체적으로 세 영역으로 나뉜다. 수직적인 세계와 수평적인 세계, 그리고 이 세계를 연결하는 이른바 두레박의 영역으로 구분되는 데 이 세 영역은 물론 하나의 세계로 종합된다. 이것이 동양철학이 말하는 천지인(天地人)의 구조이며 작가는 이 구조를 ‘길가메쉬의 미궁’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은 이 세 조형성의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며 불을 토하는 용의 이미지를 연출한다. 그러니까 기둥의 세계가 해체되면 그 하나 하나의 도예 형태들은 각기 독립되는 도예작품이 된다는 뜻이다. 이들 개개인의 작품들은 모두 신화시대의 중국 청동제기에 나타나 도철(굼벵이)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그 문양은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훌륭한 원용이라고 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작품들을 좀더 가까이 들여다보기로 하자.
수평세계에 속하는 도예들은 기둥 위에 올라가게 되지만 작가가 이를 정적기라고 명명함으로써 우리는 이 작품들이 바다에서 헤엄치는 청용의 이미지임을 알게 된다. 청용의 이미지가 사신도에서 보듯이 바다밑에서 서식하던 우주적인 에너지가 지상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천장에 매달게 되어있는 세 번째 작품에서 그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왜냐하면 천장에 매달리는 작품들은 이 종합주의 작품에서 구원의 메시지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두레박은 우리의 민담이나 구전문학에서 구원의 알레고리가 된다. 작가는 장엄한 고대 영웅전설의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천장으로부터 구원의 두레박을 드리우게 함으로써 종말에 이른 세계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모험하는 길가메쉬의 서사적인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 보인다. 어쨌건 도예가 단순한 일회적인 제시용 볼거리가 아니라 순수예술이 하는 기능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그릇이면서 동시에 의미작용을 하게 된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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