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0년대 하반기
글/김정아 스웨덴리포터 사진/로얄 코펜하겐 제공
1800년대 하반기의 덴마크 산업자기를 개척한 로얄 코펜하겐과 빙 앤 그뢴달
1800년대 후반기에 조직된 덴마크의 산업주의자, 예술가, 공예가들로 구성된 광범위한 조직의 추진력은 덴마크의 산업자기 디자인이 근대적 이미지를 뚫고 나가 현대적 디자인으로 출현하게 한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이의 기초적인 발단은 사실상 두 자기회사의 예술 책임자들에 의해 자극되었다고 볼 수 있다. 1884년부터 1916년까지 로얄 코펜하겐 예술 책임자는 건축가 아놀드 크로그(Arnold Krog)였으며, 화가인 피에트로 크론(Pietro Krohn)이 1885년부터 1892년까지 빙 앤 그뢴달(Bing & Grondal)의 예술책임자로 이 시기의 덴마크 산업자기 디자인을 이끌어갔다. 1897년부터 1900년까지는 조각가이자 화가인 윌럼센(J. F. Willumsen)이 빙 앤 그뢴달의 예술 책임자로 크론의 뒤를 이었다.
1884년에 로얄 코펜하겐의 예술책임자로 임명된 크로그는 덴마크 왕궁의 재건축에 참가한바 있는 젊은 전위 예술가(아방 가르데: Avant garde)이자 건축가로 상류층에서 태어나 전 세계를 여행하며 다양한 경험을 얻고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다. 그가 예술책임자로서 가장 먼저 시작한일은 블루 훌루티드(Blue Fluted) 문양과 색조, 하회기법의 개발 작업이었다. 크로그는 ‘아르 누보(영어로는 신예술: New art, 프랑스어로는 아르 누보: Art nouveau)’ 풍의 디자인을 좋아했으며, 예술 책임자가 된 후 블루 훌루티드 시리즈 중에서 가장 풍부한 장식이 있는 완전장식(Full lace)과 반장식 (Half lace)을 디자인했다. 그가 디자인한 훌루티드 문양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자 이 문양은 블루 훌루티드뿐만이 아니라 당시 로얄 코펜하겐을 소유하고 있던 알루미니아 회사에서 생산하고 있던 화이앙스 토기질 식기제품에도 사용하였으며, 1875년부터는 라이벌회사였던 빙 앤 그뢴달도 이 문양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빙 앤 그뢴달에서 처음 사용한 훌루티드 문양은 로얄 코펜하겐에서 개발한 바구니를 짠 듯이 조각된 브레이디드(Braided)모델에 사용한 것이었으나, 1900년대부터는 자사의 모델을 개발하여 응용하기 시작했다.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트라이파타이트 훌루티드(Tripartite fluted) 문양은 후에 개발한 새로운 디자인 시걸 서비스(Seagull service)에 적용하였는데 현재 생산되고 있는 시걸 서비스는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 콰드러플 훌루티드(Quadruple fluted) 문양을 이용하고 있다.
로얄 코펜하겐의 예술책임자 크로그는 전 세계를 여행하며 얻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동양자기의 문양이나 형태, 청화의 기법 등이 유럽의 자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특히 일본자기에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많은 기술진들을 실험실 인력으로 고용하여 새로운 하회 기법을 연구하게 했다. 그는 기존에 제한적인 방법으로만 사용되어온 청화기법을 새롭게 계발하고 응용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으며 이때 개발되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기법중의 하나는, 성형 후 반 건조된 기물의 전면에 청화를 입히고 완전 건조 후, 또는 초벌구이 후에 부분적으로 청화를 제거하여 순백색의 바탕을 부분장식효과로 이용하는 기법이었다. 크로그의 영향으로 1884 ~1885년 사이 로얄 코펜하겐은 눈에 띄게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연구가 증가하였다. 붓으로 수채화를 그린 듯이 신선한 느낌이 나도록 하는 채색기법과, 분무법으로 색조가 자연스럽게 기물의 전면에 울려 퍼지듯 하는 농담기법, 청화 이외에도 크롬에서 얻은 녹색 계열, 금을 섞어 얻는 황금빛 밤색 계열, 빨간색 계열 등의 색상 개발 등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빙 앤 그뢴달의 예술책임자였던 피에트로 크론 역시 1886년부터 1888년 사이 아르 누보의 대열에 동참하여 헤론 서비스(Heron service)를 개발하였다. 헤론 서비스는 백로를 모티브로 한 전기 아르 누보 양식의 디너서비스 제품으로, 백로를 모티브로 사용한 점이나 하회장식의 분위기는 크론이 일본화에서 받은 인상을 응용한 것이었다. 이 제품은 1888년 북유럽 무역 박람회에서 관중들을 감동시킬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에피(Eiffie Hegermann Lindencrone)는 투각, 양각, 음각 등 다양한 조각 기법을 혼합하여 표면을 조각하고 크론의 뒤를 이은 윌럼센은 기존의 상식을 무시한 대담하고 자유로운 형태를 창조하여 이 시기의 빙 앤 그뢴달을 이끌었다.
로얄 코펜하겐과 빙 앤 그뢴달의 연구는 기술적인 면에서 볼 때 거대한 기술혁명의 시작이었다. 이 두 회사의 연구 성과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색채를 부분적으로 제거하여 가는 기법과 새로운 분무 채색법 등 색조와 명암, 농도를 자유롭게 조절하는 채색 기법이다. 둘째는, 새로운 제품의 형태로 부드럽게 구부러진 곡선들과 자유로운 예술적 형태들 그리고 이에 응용된 다양한 조각기법들의 개발이다. 셋째는, 1890년대 당시에는 구할 수 없었던 고화도에도 견딜 수 있는 다양한 안료의 개발로 녹색, 회색, 밤색, 빨간색 계통 등 금을 혼합하여 개발된 안료들을 포함한다.
로얄 코펜하겐과 빙 앤 그뢴달, 두 덴마크 자기회사의 노력은 1888년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열린 북유럽 무역 박람회와 1889년 프랑스의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 무역 박람회에서 덴마크 하회장식 자기가 큰 주목을 끌게 하는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으며 대상(Grand prix)을 차지하면서 덴마크 하회장식 자기를 세계적인 무대로 진출시켰다. 이후 이들은 더욱 연구와 실험에 박차를 가하여 1900년 다시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 무역 박람회에서 또 한번 영예를 차지함으로써 확고한 입지를 다지게 하였다. 1888년과 1889년의 성공이후, 전 세계의 박물관과 미술관, 미술품 애호가들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비싼 가격에도 불문하고 서로 앞을 다투며 덴마크 하회장식자기를 구입하고자했다. 이 당시 두 덴마크회사의 자기제품들은 티파니의 보석이나 러시아의 화베지(Faberge) 보석계란과 그 재산가치가 동일시되었을 정도였다. 물론 이렇게 판매된 제품들은 모두 단일 수공예 제작품으로 이 세상에 동일한 제품은 없었다. 이에 1890년 로얄 코펜하겐이 파리에 직영점을 개관했으며, 1891년에 뉴욕, 1897년에는 런던에 직영점이 개관되었다. 코펜하겐의 본사 직영점에서 판매되는 제품을 가장 많이 구입해 가는 사람은 당시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더 3세였다. 너무나 많은 판매 수요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자 1894년 로얄 코펜하겐은 단일 수공예 제작품의 숫자를 줄이고 한가지 디자인으로 몇 개의 복제가 가능한 제품들을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맞추어 유행에 따른 현대 예술품 부서(Current art department)라는 대형 공장을 따로 설립했다. 이와 함께 두 회사는 모두 많은 화공들을 고용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오늘날의 덴마크 왕립 응용미술대학출신들로 덴마크 내에서 잘 알려진 이미 기술적으로 훌륭히 숙련된 예술가들이었다. 새로 고용된 화공들은 주로 단일 수공예 제작품과 이의 복제품제작 등 극히 개별적인 작업들에 투여되었으며, 이외 자연 풍경의 수채화적인 묘사 또는 바다 풍경, 해산물, 해양동물, 여러 육지 동물을 모티브로 한 장식들을 대형 장식용 접시나 화병 등에 그려 넣는 작업을 하였다. 1890년대를 통해 로얄 코펜하겐과 빙 앤 그뢴달은 덴마크 예술자기의 개척자 역할을 겸하여 두 회사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의 예술성에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러나 이 두 회사는 1900년 파리 무역박람회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었는데, 여기에서 로얄 코펜하겐은 최고의 기술적 성과를 인정받은 반면 빙 앤 그뢴달은 이에 미치지 못함을 뚜렷이 하였다. 이유는 로얄 코펜하겐이 크로그라는 예술책임자를 계속 임명하고 있던 것에 비해, 빙 앤 그뢴달은 1892년부터 1897년까지 예술책임자가 없어 체제를 정비시키지 못한 데에 있었다. 1891년부터 1894년 사이 많은 사람들이 두 회사가 합병할 경우 덴마크 자기가 국제무대에서 보다 더 큰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하면서 두 회사의 합병을 적극적으로 제안하였는데, 당시에는 이 일이 성사되지 못했으나 100년 후 1987년 이 두 회사는 실제로 합병을 하였다.
산업혁명과 일본풍 애호주의, 그리고 아르 누보
1800년대 상반기부터 이미 세력을 확보한 부르조아지(유산계급: Bourgeoisie) 계급은 철도, 도로확장, 전화, 공업 등 산업화와 대량생산화에 열중했다. 이들이 공예 예술품을 보는 시각은 이를 소유하고 싶은 모든 사람들이 소유하고 즐길 수 있어야한다는 견해였다. 이러한 이들의 견해는 당연히 투표권을 가진 시민들을 염두에 둔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공예. 예술가들을 지원하며 그들의 견해를 지지하는 세력을 확충해갔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정치성이 뚜렷한 ‘장식미술운동 (Decorative art movement)’은 제일 먼저 영국에서 시작되어 산업혁명의 열기로 이어졌다. 산업혁명의 결과, 전에는 일반 시민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공예 예술품을 일반가정에서 일상생활용품으로도 사용할 수 있게된 반면 대량생산되어 쏟아져 나오는 제품에는 예술가의 영혼이 담겨있지 않다는 비판을 받게되었다. 영국의 건축가와 미술가들 중 존 러스킨(John Ruskin)과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는 산업화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1888년 ‘미술 공예 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이라는 운동 연합체를 창설했다. 이들의 이상은 기능성을 가진 제품에 공예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자는 것이었다. 이들의 이상은 영국이외에도 많은 다른 나라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이 시기의 덴마크 디자이너들 역시 이의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 유럽인들을 사로잡은 또 다른 유행은 ‘일본풍 애호주의(Japonism 또는 Japanism)’이었다. 1500년대부터 항구를 폐쇄했던 일본은 1854년 유럽인들과 미국의 요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항구를 개방했다. 상업성을 가진 유럽의 산업체들은 새롭게 재발견된 듯한 일본의 문화, 예술, 각종 장식미술, 공예품에 관심을 집중하였으며, 특히 유럽인들을 사로잡은 것은 일본인들이 자연을 예술에서 다루는 방법이었다. 유럽의 미술. 공예운동에 참가하는 예술가들 역시 일본인들이 예술을 통해 자연을 표현하는 방법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일본이 최초로 세계 무역 박람회에 참가한 것은 1867년이었으며 이후 파리에 첫 일본제품 직수입판매점을 열었다. 일본제품 직수입판매점을 개관한 첫 사업가들 중에는 사무엘 빙(Samuel Bing)이라는 미술중개인이 있었는데 1896년 그가 개관한 일본제품 직수입판매점의 이름은 ‘아르 누보(Art Nouveau)’였다. 그가 이러한 이름을 지은 것은 이 가게에서 판매되는 제품들은 새로운 양식의 등장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1888년부터 1891년까지 ‘일본 예술(Le Japon Artistique)’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였는데 이 잡지는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불어넣었다. 로얄 코펜하겐의 예술책임자였던 크로그, 스웨덴을 대표하는 화가 칼 라손(Carl Larsson), 인상파의 거장 모네(Monet) 등 일일이 거론할 필요도 없이 거의 모든 유럽의 예술가들이 일본화와 일본제품을 구입했다. ‘일본풍 애호주의’는 빠른 속도로 ‘아르 누보’와 ‘인상주의(Impressionism)’의 기초가 되었다.
‘아르 누보’는 자연의 형상에서 인상 받은 것을 바탕으로 하며 이를 추진한 예술가들은 당시의 아방 가르데(전위 예술)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 새로운 양식은 유럽전역을 통해 각각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는데, 이름 또한 나라에 따라 다르게 불리었다. 독일에서는 ‘유젠트(Jugend)’라고 불리었으며, 영국에서는 ‘신 예술(New Art)’, 프랑스에서는 가게의 이름을 따서 ‘아르 누보’라고 불렀다.
덴마크의 로얄 코펜하겐과 빙 앤 그뢴달은 아르 누보에 깊이 심취한 두 예술책임자들의 영향으로 당연히 아르 누보 풍의 제품들을 제작했다. 1897년에 로얄 코펜하겐의 크로그가 디자인한 마거리트 디너서비스(Marguerite dinner service), 1888년 빙 앤 그뢴달의 크론이 디자인한 헤론 서비스, 1892년 빙 앤 그뢴달의 화니 가르데(Fanny Garde)와 에피가 디자인한 시걸 서비스 등은 모두 대표적인 당시의 아르누보 양식의 자기 디자인들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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