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김문정 홍대도예연구소 연구원
제이슨 워커(Jason Walker)를 만난 것은 한달 전 2003 세계도자기 비엔날레 여주 행사장에 마련된 워크숍 행사장에서였다. 연신 안경 너머로 눈빛을 반짝이는 그에게서 자신의 주변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 생활화된 탐정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이러한 느낌은 그의 작품을 보고 난 후 더욱 확실한 것이 되었다.
실용기(實用器)의 몸체 위에 그려진 세밀화는 한 눈에 보기에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모두 무유(無釉) 자기로서, 매트한 표면 위에는 검은 안료만을 이용하여 강하고 경쾌한 느낌의 블랙 앤 화이트 세밀화가 그려졌다. 등장하는 주 소재는 동물, 곤충, 식물 등과 같은 자연의 이미지와 성냥개비, 기계부품, 철책과 같은 인공적인 산물이다. 작가는 자연의 이미지와 이에 반하는 인공물을 함께 배치시켜 가공의 상황을 재현하였다. 이 가공의 상황은 뛰어난 묘사력과 강한 인상으로 인해, 포르말린에 넣어 둔 동물 표본과 같이 영원히 정지되고 고정된 순간을 연출한다.
각각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모든 소재들은 메타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어서, 그의 그림은 단순히 재현(representation)적, 표현적 효과를 넘어서 비잔틴 미술이나 북유럽의 후기 고딕 미술처럼 수많은 상징과 수수께끼를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회화의 상징적 요소들과 그것의 플롯 구성은 3차원의 실용기와 상승작용을 일으켜 더욱 효과적으로 관람객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3차원의 형태와 2차원의 회화를 결합하여 얻을 수 있는 효과를 작가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도예를 전공하기 이전 그는 주로 회화 작업을 했고, 이와 같은 그의 관심과 능력은 오히려 ‘도자’라는 매체를 접하고 난 뒤 더욱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도자기가 3차원의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는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훨씬 즐거운 작업이다. 또한 도자기는 두 면 혹은 세 면의 방향성을 지니게 되므로, 나는 거기에 각각 다른 그림을 그려 그것들을 대비시키거나, 서술적인 이야기 구조를 설정한다.”
워커가 세르게이 이소포프(Sergei Isupov), 그리고 커트 와이저(Kurt weiser)와 구별될 수 있는 것은 3차원 형태의 다양한 방향성과 각각의 방향에서 허용되는 한정된 시각적 범위를 회화의 플롯 구성과 결합했다는 점이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작가의 회화가 지닌 독창성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평면의 캔버스에 비해 3차원의 조형물은 그 자체로도 많은 이야기 거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조형물 위에 입혀진 회화는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매우 다양한 시각적 변화를 제공한다. 이는 관람자나 작가 모두에게 매력적이다. 그런데 왜 작가는 수많은 3차원 형태 중 굳이 실용기를 사용하는 것일까?
“내가 실용기의 형식을 차용하는 것은 익숙한 형식적 포맷을 이용해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하나의 장치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실용적인 가치보다도 미학적인 가치가 우선된다.”
여기서 실용기는 새로운 예술형식이 된다. 뚜껑, 굽, 바닥과 같이 본래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존재했던 각 부분들은 서사적인 이야기 구조와 결합되면서 새로운 기능을 부여받는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 드러나는 것과 그 이면의 이야기, 원인과 결과, 또한 은폐되거나 지나쳐버리기 쉬운 사실들… 작가는 실용기의 정면, 후면, 바닥, 뚜껑 속까지… 각 부분들을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제 작가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살펴보도록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자연을 말하고 있다. 자연과 비자연적인 것의 대립과 공존이, 그의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주제이다. 그에게 자연은 삶의 일부이다. 작가는 아이다호에서 성장하였으며 항상 캠핑, 하이킹, 산책과 같이 자연 속에서 하는 활동을 즐겨했다. 이 모든 자연과 밀접한 일상생활은 작업의 영감이 되고, 작가관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예술가로서 나는 인간이 사용하는 기술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기술이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게 하며, 자연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인류는 역사 이래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자연을 수없이 파괴하고 오염시켰다. 그러나 결국 그 결과는 고스란히 자연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자연의 대립자인 인간에게 되돌아왔다. 그것뿐만 아니라 자연이라는 개념은 그것의 본질과 매우 다르게 인식되고 있다. 그 이유는 편리와 발전을 위해 고안한 여러 기술과 장치들이 역으로 그것을 창조한 인간에게 거부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자연은 여가, 일상에서 벗어남, 그리고 매우 특별한 어떤 것이 되고 있다. 또한 세대가 젊어질수록 환경으로서의 ‘자연’은 빌딩 숲의 도시와 각종 미디어 매체일 것이다. 다시 말해 야생 동물이 뛰어다니는 너른 대지와 깎아지르는 듯한 절경의 산세는 다큐멘터리나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가상의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경험이 거의 없는 젊은 세대들에게 영화 무대 세트와 개념적으로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워커는 자연의 소중함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우리가 깨닫지 못한 채로 받아들이고 있는 기술과 기계,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은 환경의 변화를 제대로 응시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자연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또한 자연과 모순적 관계에 있는 인간을 염려하고 있다. 그 전달 방법은 차분하고 차가운 세밀화이지만, 우리는 그것의 바탕에 깔려있는 작가의 본심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섬세함과 치밀함, 그리고 그 근저를 이루고 있는 애정과 유머는 작가 그 자체를 대변하고 있다. 작가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밀도 높은 작품과 작업에 대한 강한 확신, 그리고 아치 브레이(Archie Bray foundation)에서 지낸 2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노라고 서슴없이 대답하는 그에게서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예측하기는 어려우나, 그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JASON WALKER
6230 Hwy. 12W, Helena, MT 59601 U.S.A
필자약력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도예과 졸업
동 대학원 예술학과 수료
현재, 홍익대학교부설 도예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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