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김종태 _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공예디자인학과 교수
1. 의 의
우하리 요지는 경북 상주시 공성면 우하리 37번지 장수황씨 제실 귀후제1)가 있는 곳이다. 우하리 요지에 관한 학술적 연구 또는 공식적인 조사·보고는 아직까지 없었다. 이 부분의 부재는 정확한 자료(명문 등)를 찾아내는 일에 대한 어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문제들은 많은 연구가들의 연구의욕을 떨어지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고 급기야 ‘주요 문화사료 방치’라는 문제를 낳게 되었다.
여기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다수 있었지만 이렇다할 결과를 찾아 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다만 김세광의 연구2) 즉 조선 초 최고의 상품 청자를 생산하던 상주지역 「전통도자의 생산과 수요」- “당시의 도자수공업이 어떻게 발전하고 쇠퇴되었는가?”-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우하리 일대가 15세기의 분청사기를 생산했던 지역이었음을 밝힌 바 있다. 1999년의 이 연구는 우하리에 관련된 숙제를 명확하게 풀어내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불씨를 당기는 동인을 가져와야만 했다.
우하리 요지는 14세기 이후 상주지역이 전문적생산기술수준을 갖추고 있었던 시기에 운영된 소규모 자기소이다.
이미 기존의 연구들에서 밝혀진 바 있듯이3), 14세기 이전에서부터 초기에 이르는 시기는 지나친 수취관계로 인한 공급구조적인 제약하에서도 교환·거래를 위한 도자수공업으로 발전하고 있던 시기였다. 강제수납 등 「경제외적강제」는 권력형부조리를 낳고, 이로 인한 고려왕조의 구조적 모순은 자기 굽는 일을 전업으로 삼는 장인들의 생산의욕저하와 유망현상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결국 장인들의 기술, 생산능력에 비해 도자요지는 더이상 확산될 수 없었으며 더 이상의 생산 활동에 대한 진전을 보지 못하였던 시기이다.
14세기 이후에 이르러 침체되어 있던 도자수공업에 있어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즉 전통도자기 생산기술(번조기술)의 변화와 민영수공업의 발전이 그것이다. 그 예로는 ‘눈배기자기’의 출현과 분청사기생산요지의 확산이 대표적이다. 분청사기는 조선전기의 매우 특색있는 도자기로서 14세기에 출현, 고려말기의 퇴락한 상감청자기법으로부터 출발하여 세종대에 기법이 더욱 다양해지고 세조대에 이르러 성장기를 맞이하였다가 16세기 전반 이미 백자에 흡수·소멸되기 시작하여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그 생산이 거의 끝났으리라고 본다. 즉 발생으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약 200여년간 생산되었다. 이 시기에 분청사기의 생산이 주를 이루었으며 전통도자수공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우하리 요지는 이 시기에 상주의 어산리(세종실록지리지 상의 북추현리), 상판리(세종실록지리지 상의 동기미외리)와 함께 대표적인 요지로서 중품中品의 분청사기를 생산하던 요지였다. 우하리는 바로 여기에 편승되어 있었던 것이다.
2. 지리·역사적 배경
경상북도 최북단의 북서쪽에 위치한 상주시는 경·위도 상으로 동경 128° 20‘ 28“~127° 47’ 55”, 북위는 36° 14‘ 06“~36° 39’ 14”이다. 상주시의 경계는 동쪽으로 낙동강이 흘러 예천군·의성군과 접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충북 보은군·영동군, 남쪽은 김천시와 충북 영동군, 북쪽은 경북 문경시와 충북 보은군과 인접하고 있다. 상주시의 서쪽은 소백산맥이 뻗어 영남과 강원·호남·호서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동쪽은 낙동강 상류를 따라 분지와 저지가 발달된 서고동저의 지세를 이룬다. 청리면·공검면·공성면·낙동면에서 비교적 넓은 들판이 있으나 그 외 지역은 대부분 산간지대이다. 또한 내륙산간 분지에 자리하고 있어 대륙성 기후가 뚜렷하게 나타나며, 연평균 기온은 12.7℃, 강수량은 1,050mm 정도이다.4)
수계는 크게 금강수계와 낙동강수계로 구분된다. 금강수계는 석천이 화동면에서 발원하여 반계천을 합수해 금강에 유입되고, 낙동강 수계는 이안천이 속리산 남록에서 발원해 문경에서 남류한 영강과 합쳐져 낙동강에 유입된다. 또 北川이 내서면에서 발원해 공성·청리·외남면에서 발원한 병성천과 합쳐져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그리고 하천유역에는 곳곳에 비옥한 퇴적평야를 일찍부터 사람들이 정착생활하기에 좋은 입지로 제공되어 왔다.
이러한 상주지세에 대해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상주는 일명 낙양이라 하고, 조령아래의 큰 도회이다. 웅대한 산세와 넓은 평야 그리고 북쪽은 조령에 가까워 충청, 경기와 통하고, 동쪽은 낙동강에 임하여 육운과 수운이 다 남북으로 통하여 수륙교통에 요지를 이루어서 무천교역에 편리하므로 부자도 많고, 이름난 학자와 높은 관리도 많다.”라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자연환경에 영향을 받아 정착했던 국가이전의 역사는 낙동강, 이안천, 병성천 지역에 산재하는 구석기 및 신석기문화유적, 지석묘, 생활유적이 있고, 안정된 국가체계가 성립될 무렵에 형성된 고총·고분과 성지, 생활유적이 있다. 또 삼국, 고려, 조선시대의 국가체계 하에서는 산성, 관아지, 생활유적를 비롯해 문향으로써 향교, 서원, 서당과 사족의 종택과 민가도 많이 남아있다.5)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상주목은 동쪽으로 비안현 경계까지 67리, 남쪽으로 선산부 경계까지 39리, 동부 경계까지 40리, 금산군 경계까지 47리, 서쪽으로 충청도 보은현 경계까지 70리, 북쪽으로 함창현 경계까지 29리 그리고 서울까지 4백리6)로서 그 범위가 가히 크다.
건치연혁을 살펴보면 상주군(사벌국, 사불국, 상주, 상락, 상산, 귀덕군)은 경상북도 6시 24군의 하나, 본래 삼한 때 사벌국 또는 사불국이었는데, 신라 제 12대 점해왕이 취하여 사벌주를 삼고, 제 23대 법흥왕이 주를 폐하여 군주를 두었다. 제 24대 진흥왕이 주를 폐하여 상락군으로 하였다가, 제 31대 신문왕이 다시 사벌주로, 제 35대 경덕왕이 상주로, 제 36대 혜공왕이 다시 사벌주로, 고려 태조 23년(940)에 다시 상주로 고쳤다. 그 후에 안동도호부라 하였다가, 제 6대 성종 2년(983)에 13목을 두었고, 같은 14년(995) 절도사를 두어 귀덕군이라 호를 하였고, 제 8대(1014)에 상주안무사로, 같은 9년(1018)에 다시 상주목으로 고쳤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 관찰영을 두고, 제 3대 태종 8년(1408)에 도관찰사로 목사를 겸하게 하였다가, 같은 10년(1410)에 목사를 따로 두었으며, 제 4대 세종 31년(1449)에 비로소 진을 두어 목사로 우도병마절도부사를 겸하게 하였다가, 곧 폐지하였다. 제 14대 선조 29년(1596)에 관찰영을 대구로 옮기면서 그대로 상주목이 되어 내동, 중동, 단동, 단남, 단서, 단북, 장천, 내남, 외남, 청동, 청남, 공동, 내서, 모동, 모서, 화동, 화서, 화북, 내북, 중북, 외서, 외북, 은척, 영순, 산동, 산남, 산서, 산북의 30동리를 관할하였다. 고종 32년(1895) 지방 관제 개정에 의하여 단동, 단남, 단서, 산서, 단북의 5면은 문경군에 각기 넘겨주고, 나머지 23면을 관할하다가,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함창군의 현내, 동면, 북면, 상서, 수상, 수하의 6개 면 전부를 병합하여, 상주, 사벌, 낙동, 청리, 공성, 중동, 모서, 공검, 함창, 이안의 1읍 17면, 237개리로 개편 관할하였다. 동쪽은 예천군와 의성군, 남쪽은 선산군, 금릉군과 충청북도 영동군, 서쪽은 충청북도 옥천군과 보은군, 북쪽은 문경군에 닿는다.7)
이러한 상주는 내륙에 위치하면서도 낙동강유역의 발달된 농경문화와 낙동강을 이용한 수운과 소백산맥을 통한 육로가 연결되는 지리적 여건으로 국내의 정치·경제·군사적 변화에 큰 역할을 담당하여왔으며, 현재에는 1986년 상주시로 승격되고, 1995년 상주시와 상주군이 병합되어 오늘에 이른다.8)
고문헌의 기록들
주된 자료는 『세종실록지리지(이하 세지)』, 『동국여지승람(이하 승람)』, 『경상도지리지(이하 경지)』, 『경상도속찬지리지(이하 속지)』 등이다. 이 고전기록(사료)들에 의하면, 당시 도자기소의 경영실태를 알 수 있는 각 지방 토산품물에 대한 기록들을 비교적 상세하게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훌륭한 활용가치를 지닌 사료라고 생각된다.
『세지』의 자료
먼저 1454년(단종 2년)에 편찬된 『세지』9)는 세종의 명에 의해 1424~1432년 사이에 자료수집이 이루어졌고 1454년 『세종실록』의 편찬과 함께 간행된 것이다. 『세지』는 1424~1432년 세종의 명에 의하여 조사가 이루어졌으므로 이 기간에 실제 자기소가 운영되고 있었음을 대변해 준다. 즉 세종 6년 11월의 병술조의 “ ……소대제학召大提學 변계량일卞季良日 고노점희故老漸稀 불가무문적不可無文籍 본국지지급本國地志及 주부군현州府郡縣 고금연혁古今沿革 비찬이관……”에서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세지』는 세종 6년(1424)부터 그 자료를 수집하였다. 정확히 1424~32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당시 324개의 도자기소가 실질적으로 생산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지』에는 당해시기에 생산 활동을 한 전국 도자기소의 위치와 품질을 기록하고 있으나, 거기에는 도자기소가 있는 주, 군, 현과 그 품질의 상, 중, 하만 기록되어 있을 뿐, 각 자기소의 경영특성을 반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당시의 양상을 파악하는 매우 귀중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왜냐하면 기록된 자기소의 분포도는 곧 그 지역의 도자기소를 경영하기 위한 입지임을 잘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 기록된 자료들을 자기소와 도기소별로 나누어 집계한 것은 [표 1]과 같다.
당시 전국의 총 324개소 중 자기소가 139개소, 도기소가 185개소로서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표 1>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도자기소 중 대부분이 남쪽 4도에 집중되어 있다. 즉 평안·함길·황해의 30개소를 제외한 나머지 295개소는 남한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특히 경상·전라지역에서는 자기소가, 경상·전라·충청지역에서는 도기소가 많이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도자기 생산이 남한지역에서 번성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교통로가 발달되지 못했던 당시로서는 도자기를 생산하기에 적합한 지역이 남한일대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해준다. 왜냐하면 그것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입지조건, 즉 충분한 물과 수목, 기상조건 그리고 가장 중요시되는 흙의 질 및 채취량이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지』의 기록에서 주의하여 볼 것은 상·중·하품의 구분이다. 전국에서 상품을 생산하였다고 기록된 곳은 네 곳으로서 경기도 광주, 경상도 상주와 고령이다. 상주는 상품을 생산한 곳이 두 곳으로 무려 반을 차지한다.
『경지』의 자료
그 서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영락永樂 이십이년二十二年 갑진동甲辰冬 십유이월十有二月 삭임인朔壬寅 춘추관수교경상도주부현春秋館受敎慶尙道州部縣 역대관호歷代官號 읍명연혁급리합邑名沿革及離合 령호조令戶曹 이관각도移關各道…… 을사동십유이월삭일병인감사乙巳冬十有二月朔日丙寅監司 진양하연연량식晉陽河淵演亮識”10)
영락 22년이라 함은 세종 6년(1424)년을 말한다. 즉 「경지」도 「세지」와 동년대에 자료를 수집하고 찬술하였다는 사실을 말한다. 호조11)에서는 각 도에「경지」의 찬술요령을 다음과 같이 하달하고 있다.
“일의예복정공부一依例卜定貢賦 모모물某某物 기토소산其土所山 모모물某某物 시여시행위호의是如施行爲乎矣 토산土産 금은철동金銀鐵銅 …… 자기도기磁器陶器 …… 병이상실시행사幷以詳悉施行事”12)
여기서 「복정공부」란 「공부상정도감13)」에서 작성한 「공안」이지만, 그 공안에 따라서 어떤 종류의 토산물(모모물)이 각 주, 현에서 생산되고 어떤 종류의 토산공물을 수납하고 있는지 상세하게 낱낱이 수록하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지시에 따라 찬술된 지리지의 토산 공물 조에는 경상도 내의 25개 주현에서 자기 혹은 사기를, 21개 주현에서 도기를「토산공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세지」와 「경지」 양 지리지의 도자기소와 도자기토산공물은 거의 일치한다. 즉 전자에 도자기소가 있는 고을에는 후자에도 반드시 도자공물이 기록되어 있고, 전자에 자기소만이 있는 고을에는 후자의 경우 자기공물만을 기록해 놓았다. 이러한 사실은 두 지리지의 자료가 서로 신빙성이 있다는 것을 시사할 뿐만 아니라, 거의 동년대에 동일한 목적으로 찬술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특히 호조에서 그의 찬진을 지시한 내용으로 보아 지조, 공부, 및 요역의 수납원을 확보하는데 그 근본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속지』의 자료
『속지』는 『세지』 및 『경지』 양 지리지보다 약 반세기 후인 예종 원년(1469년 6월)에 찬술되었으며, 『세지』와 동일한 방법으로 기록되었다. 전·후자는 동일한 방법으로 기록되었으므로 특히 자기소의 폐쇄시기와 함께 경영적 성격을 파악하기가 용이하다.
여기에서는 소재주군현별 품질의 상·중·하만 기록하고 있다.
『세지』와 『속지』에 기록된 경상도 소재 도자기소의 수는 무려 12곳이나 차이난다. 즉 자기소의 경우 전자에서 존재 했었던 37개소가 후자에서는 27개소로 10개소가 없어졌으며, 도기소의 경우 전자에서 34개소이었던 것이 후자에서는 31개소로 3개소가 사라졌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도합 12개의 자기소가 폐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상의 자기소가 줄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상품을 생산하던 자기소 또한 모두 없어졌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이를 상·중·하별로 알아보면 [표 5]와 같다.
[표 5]에서 품중의 경우는 양 지리지 모두 같다. 그러나 품상의 경우 『세지』에서 3개소이었던 것이 『속지』에서는 전부 없어졌고, 품하의 경우 6개소가 없어졌다. 즉 상품을 생산했던 중모지역의 2개의 자기소가 없어졌고, 노산리에 중품 단 1개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역시 상품을 생산했던 고령현의 경우 하품로 격하되었다. 특히 상주목과 고령현의 경우는 중앙으로부터 간접통제를 받는 지역이어서 왕조의 구조적 모순이 더욱 많이 작용할 수 있었던 지역이다. 이 시기에 우하리 요지는 품 하로 격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 운영 시기는 15세기 초·중반까지로 볼 수 있으며, 생산수준이 격하되었던 이유는 관어용 자기를 수납하는데 있어서 많은 장애 즉 지나친 강제생산·수납으로 말미암아 급기야는 폐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좀 더 구체화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세종실록』 「지리지」(1424~1432년)의 상주목 토산조의 기록에는 세 곳의 자기소와 두 곳의 자기소가 있으며, 자기소와 도기소의 품질은 상·중·하로 구분되어 표시되었다. 즉,
“상주목에는 자기소가 셋이니, 하나는 중모현 북쪽 추현리에 있고 상품이다. 하나는 중모현 동쪽 이미외리에 있고 상품이다. 하나는 공성현 서쪽 원동에 있는데 중품이다. 도기소는 둘이니 하나는 주 서쪽 벌을야리에 있고 하나는 단밀현 단곡에 있는데 모두 하품이다.(磁器所三 一在中牟縣北楸縣里品上 一在中牟縣東已未?里品上 一在功城縣西院 洞品中 陶器所二 一在州西伐乙夜里 一在丹密縣丹谷皆品下)”
위의 기록에 나타난 자기소 세 곳의 위치를 추정하면 다음과 같다.
① 중모현 북쪽 추현리(상품) → 화동면 어산리
② 중모현 동쪽 이미외리(상품) → 모동면 상판리
상판저수지 주변일대14)
③ 공성현 원동(중품) → 공성면 우하리15)
우하리는 [표 5]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양 지리지에 기록된 중품 생산지 8곳 중의 한 곳으로 여전히 그 시기에 남아 있던 요지임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된 전국의 자기소 139개, 도기소 185개 중에서 상품의 자기를 제작한 곳은 전국에 네 곳 밖에 없다. 즉, 경기도 광주의 번천리(벌을천), 고령의 사부동과 기산동(예현리), 그리고 상주의 상판리(이미외리)와 어산리(추현리)이다. 그러므로 세종 당시 상품자기의 50%를 상주에서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주지역의 가마터들은 도굴꾼의 도굴장소만 되고 있을 뿐, 가마터의 존재를 파악하기 위한 기초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경기도 광주의 번천리(국가사적314호)와 고령의 사부동·기산동(국가사적 71호, 72호)의 가마터가 세종 당시의 상품 자기소임이 확인되어 각각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것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지명고증의 근거
우하리 窯址의 지명고증을 위한 여러 기록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종실록』「지리지」
① “…중모현中牟縣은 본래 도량현刀良縣인데 경덕왕이 도안道安으로 이름을 고쳐서 화령군化寧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② “…공성현功城縣은 본래 신라 대병부곡大幷部曲인데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③ “…봉화烽火가 여섯 곳이니, 공성 회룡산回龍山은 현 서쪽에 있다. 남쪽으로는 금산金山 소산所山에 응하고 동쪽으로는 청리靑里 서산西山에 응한다…”
③의 내용에서 회룡산 봉수대의 기록은 현재 우하리 양촌마을 뒷산인 봉우산(해발541.9m)에 남아 있는 봉수대 터와 일치하는 것으로 본다. 상주문화원,『상주문화유적』, 1996, pp.236~237
봉우산에는 우하리 양촌 마을로 내려가는 봉우재와 북쪽의 회룡리로 내려가는 봉골이라는 골짜기가 있어 지금의 봉우산이 『세종실록』 「지리지」당시의 회룡산임을 추정할 수 있다. 회룡과 우하리 두 마을은 지금도 당시 중모현이었던 모동면과 동쪽 경계를 이루는 공성면의 서쪽 경계이다.
조선후기지방지도 경상도편17)
중모현은 모동면과 모서면으로, 공성현은 공동면과 공서면으로 분리되었으나 지방의 각 군현에 설치된 창고는 두 개의 면으로 분리되기 이전의 지명인 중모현과 공성현의 이름을 따라 중모창과 공성창이 그대로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공동면과 공서면 두 지역이 이전의 공성현 지역과 일치함을 알 수 있으며, 위에는 살펴 본 『세종실록』 「지리지」상주목의 공성현 서쪽의 회룡산 봉화가 18세기 후반에는 공서면의 서쪽에 있는 회룡산과 인접해 있는 용산봉대로 표기되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세종실록』「지리지」공성현 서쪽의 원동은 조선후기 지방지도에 표기된 공서면의 서쪽 용산봉대 근처임을 추정 할 수 있다.
상산지도
이 지도는 1830년 다산 정상우에 의해 제작된 상주전도이다. 정상우는 1830년에 절충장군으로서 상주진영장으로 부임하여 이 지도를 제작하였다. 상산지도에는 산천과 부락을 상세하게 그리고 사적지와 호수, 거리 등을 명시하였는데, 공성현의 서쪽 봉산암아래에 우하가 표기되어 있어 현재의 우하리의 지명이 최소한 1830년부터는 그대로 지금까지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지명고증에서 알아 본 바에 의하면 현재 위치는 (그림 1)과 같다.
(다음호에 계속)
1) 우하리 분청사기요지 위치도 참조
2) 김세광,『상주의 도자생산과 요지』, 상주문화총서제3집, 1999.
3) 김세광의 전게서.
4)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상주 청리유적 발굴조사 개보Ⅱ, 1997.4, p3.
5) 상주시·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상주시문화유적분포지도, 2002, p16.
6) 재단법인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Ⅳ, p. 48
7) 한글학회지은 한국지명총람 5 경북 편, 한글학회, 1978, p. 187.
8) 상주시·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상주시문화유적분포지도, 2002, p16.
9) 「세종실록」의 부록인 지리지에는 각 지방의 토산품물을 다루고 있는 부분이 있다. 토산조에 보면 토산품물을 제작하고 있던 관아를 중심으로 그 위치를 동·서·남·북으로, 자기 및 도기 의 제작수준을 상·중·하로 기록하고 있다.
10) 「세종실록」권 이십육., 육년 십일월 병술조.
11) 공부 호구 전량 식화 등을 관장하는 중앙관서를 말함.
12) 「경상도지리지」경주도 경주목조.
13) 태종원년(1392)에 각 지방 특산물의 공부를 책정하기 위해 설치한 감시관아로 태종원년에 공안을 완성하였음.
14) ①, ②는 김세광의『전게서』에서 고증
15) 다음의 지명고증 참조
17) 18세기 후반 제작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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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속찬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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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약력
학력 :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공예학과 동대학원 졸업(미술학 석사)
연세대학교 공과대학 세라믹공학과 대학원 졸업(공학 석사)
충북대학교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개인전 3회, 단체전 100여회, 저서 1편, 논문 12편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현재 :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공예디자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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