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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중품자기소에 관한 연구 -우하리 요지를 중심으로(2)
  • 편집부
  • 등록 2005-02-25 01: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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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종태 _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공예디자인학과 교수 3. 기존연구에 근거한 우하리 출토자료 고찰 일반연구1)에서는 14세기 이후의 가장 특징있는 생산품으로 분청사기를 말한다. 분청사기는 청자의 번조방법과 같은 환원기법으로 생산하기 때문에, 현재의 도자요지 관련 보고서들에서는 분청사기로 혹은 청자로 표현하기도 한다.2) 분청사기에 대한 관심은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사업이 전국적으로 실시되면서 고조되었다. 그 결과 1915년부터 약 20여 년에 걸쳐 『조선고적도보』가 출간되고 1935년 제 15책으로 분청사기와 백자가 수록된 도록이 발간되어 오늘날까지 이용되고 있었다. 기존의 자료와 연구들 가운데 요지로 밝혀진 기초 자료들을 활용하여 14세기이후에 나타나는 자기별 생산의 추이를 보면 다음의 <표 6>과 같다. [표 6] 14~16세기 자기별 생산의 증감추이 시 기 14세기 15세기 16세기 종 류 비 고 청자류 107 41 23 분청류 20 279 169 백자류 40 110 135 도기류 ? ? ? 계 154 430 327 전체적으로 볼 때, 14~16세기의 변화는 154단위 → 430단위 → 327단위로 생산이 변화함을 알 수 있다. 자기별로는 청자가 107 → 23단위로 감소되는 반면, 분청사기는 20→279 → 169단위로 대폭 증가추세로 나타나 대조를 이룬다. 백자의 경우는 40 → 110 → 135단위로 그 생산이 꾸준히 상승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분청에 있어서 15세기의 279단위에서 169단위로 총 110단위 생산이 감소되고, 백자에 있어서 15세기의 110단위에서 16세기의 135단위로 총 25단위 생산이 증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실은 이 시기에 서서히 분청이 백자로 대체돼 갔음을 시사하는 내용이다. 강경숙3)에 의하면 분청사기는 14세기후반부터 퇴락해 가던 상감청자에서 변모 발전하여 15세기에 완성되는 도자기이다. 14세기말~15세기초의 분청사기 태토는 수비가 잘 안되고 잡물과 철분의 함유가 많아 표면이 흑회색을 띠었으나 차츰 정선된 회청색의 경질태토로 발전한다. 분청사기를 만들 때 어떤 지방에서 어떤 종류의 점토를 사용하느냐, 또한 어떻게 점토를 조합하느냐에 따라서 태토의 질과 표면색상에 큰 차이를 보인다. 분청사기 태토의 화학적 성분은 천연산의 2차점토secondary clay로서 미세한 함수규산반토(SiO2·Al2O3·H2O)의 광물이고 대표되는 화학식은 고령토와 같이 Al2O3·2SiO2·2H2O이며 미분말에 습분을 가하면 가소성plasitisity or workability이 생기며 건조하면 강성을 낸다. 점토에는 1차점토primary clay와 2차점토가 있으며, 1차점토는 모암의 원위치에 분해되어 그대로 남아있는 점토로 모암의 미분해물인 석영입자와 운모의 입자가 함유되어 있고, 2차점토는 모암의 원위치로부터 물에 씻겨내려 낮은 곳으로 이동되면서 침적한 것으로서 1차점토에 비하여 미립이며 비교적 가소성이 양호하다. 점토의 종류에는 1차점토에 가까운 와목점토, 2차점토의 대표인 목절점토, 벤토나이트, 고령토 등이 있다. 특히 목절점토는 가역성이 양호한 것이 특징이며 나무와 같은 부패된 유기물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탄백색으로부터 흑백색을 띠며 지방감이 있다. 소성하면 회백색 내지 회청색이 되며 함유된 유기물로 인하여 번조수축이 크다.4) 천연유의 사용은 고려시대부터이며, 분청유약도 청자유 계통이나 청자유보다는 철분의 함량이 적어 탄청이나 흰색을 띠는 예가 많다. 물론 이와 같은 유조는 태토에 함유된 발색물질인 산화철(Fe2O3)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분청자기의 표면색조는 태도와 유약의 성분관계 뿐만 아니라 번조, 즉 산화염 상태인가, 환원염 상태인가에 따라 회청 혹은 회황색을 나타낸다. 회청색으로 나타나는 시기는 대략 조선조의 정치, 경제, 문화가 안정되는 세종 대이다. 그러나 15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 희뿌연 반투명의 유조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분청사기의 유약은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생유로서 장석, 송회, 석회석, 점토의 조합이며 그 주성분은 장석이다. 분청사기 유약에 가장 가까웠던 조합은 용인장석, 송회, 여주점토를 25 : 5 : 2 혹은 25 : 6 : 2의 비율에 기타 점토를 첨가시켰을 때 가장 근사한 투명한 분청유약이 되는 것으로 연구된 바 있다.5) 일반연구에서는 대개 분청자기의 발생을 도자양식상 퇴조해 가는 고려청자상감에 그 연원을 두고 있는 듯하며, 서민적인 생활용기로 발전되어 갔음을 강조한다. 12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던 청자기술은 13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당시의 정치적상황과의 관련과 원元의 영향으로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었다. 고려시대의 전통 위에서 신왕조의 도자기는 전혀 새로운 미의 방향이 추구되어 서민적이고 자유분방하며 활달한 생활용기로 발전해 가니 이것이 곧 분청사기이다.6) 우하리의 자편들의 대부분은 분청사기로서 14~15세기에 생활에 필요한 자기를 생산하던 곳이다. 이와 같은 생활용기의 출현배경은 다음과 같다. 즉 12세기 후반 무신 란 이래 고려 귀족사회는 서서히 변질하여 갔고, 13세기 후반 원과의 관계로 북방 문화요소가 가미되었으며, 14세기에 들어서는 지방향사와 평민층으로부터 성장한 신흥사대부와 무인세력이 중심이 되어 조선왕조가 성립된다. 7) 특히 의 집현전 설치8)는 모든 문화의 산실로서 조선왕조의 정치이념인 성리학을 현실에 반영시키며 왕권강화를 다지는데 큰 의의를 지녔던 것이다. 1424~1432년 사이의『세종실록지리지』의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도 토산공물을 위한 정확한 자료가 필요했던 까닭이고, 이것은 바로 왕권강화 및 국가권력안정이라는 문제와 직결되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왕권의 안정은 곧 문화의 성장을 가져왔다. 오늘날 기록으로 남아 있는 각 지리지 등의 문헌자료는 당시 생산 활동을 하고 있던 지역에 대한 지표조사를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 자료와 그동안의 연구결과 및 실증자료를 고찰해 본다는 것은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4. 유물의 실증적 고찰 높이 : 7.05cm, 복원구경 19.7cm, 저경 : 5.4cm, 내저원각형 : 6.6cm. 기형의 ⅓정도 잔존. 담회청색의 유조로 비교적 발색이 좋다. 유약은 전면에 고르게 시유되었는데 빙열이 많다. 굽은 대마디 굽이고 번조받침은 태도 빚음이다. 태토는 정선이며 내측면 2곳에 3조의 중권문이 돌아간다. 구연은 내만 직립하고 내저면에 내저원각이 있다. 높이 : 6.25cm, 복원구경 18.9cm, 저경 : 5.2cm 구연과 동체 일부 결실되었으며 담녹청색의 유조로 발색이 균일하다. 유약은 전면시유이며 부분적으로 표면에 빙열이 있다. 굽은 다리굽이고 번조받침은 태도 빚음이다. 굽에는 모래가 부착된 것으로 보아 최하단의 번조품으로 추측된다. 소지는 약간 잡물 혼합된 정선된 점토(회색)이고 내측면 2곳에 3조의 중권문이 있다. 구연은 내만 직립한다. 현고 : 합신 - 6.2cm, 합개 - 3.3cm, 복원구경 : 합신 - 15.4cm, 합개 - 16.5cm. 합신과 합개 일부는 구연과 동체편이다. 담회청색의 유조를 띠며 표면에는 빙열과 기포가 보인다. 문양 : 합신 - 중권문과 구연부쪽 卍(만)자문사이 측면에 낱개의 국화문이 주문양대를 이룬다. 합개 - 구연부쪽에 한 줄의 卍(만)자문대를 두고 그 안쪽으로 국화문과 卍(만)자문대가 있다. 백토는 약간의 잡물이 혼입된 정선된 점토를 사용(회색)했다. 5. 우하리요지의 현황과 경영적 특성 조사경위 및 현황 필자는 학술연구를 위해 상주 공성 우하리 일대의 분청사기 가마터를 조사하던 중 현존하는 새로운 가마터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때 도굴로 인해 이미 가마터가 심하게 파괴되어 있었지만, 가마터의 보존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조사를 실시9)하고 상주시청의 협조를 받아 응급조치를 하게 되었다. 유적이 위치한 우하리 37번지 일대는 장수 황씨 문중의 소유로서, 가마터는 약 20여 년 전에 저수지와 논을 개간하면서 가마유구가 노출되고 도편이 흐트러졌다고 한다. 또한 수로를 내는 과정에서 가마유구가 거의 파괴되었고 현재는 가마의 끝부분 일부만이 남아 있다. 심하게 파괴된 가마유구에 비해 퇴적층의 상태는 비교적 잘 남아있었다고 판단되는데, 바로 이 퇴적층이 최근에 여러 차례 도굴되어 파괴되었다. 가마의 퇴적층이란 불량품이 버려져 쌓인 도편 층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요업의 모든 정보를 간직하고 있는 유적을 말한다. 경영적 특성 출토 자편들의 대부분은 생활용기들이다. 특히 “선”자가 흑상감 된 대접편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더욱 명백한 연구를 기대할 수 있는 내용이다. 즉 우하리 요지가 세종 당시(1420년대) 음식을 관장하는 중앙 관청의 하나인 사선서司膳署에 공납貢納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우하리는 세종 당시의 중품생산지인 공성현 원동으로 추정됨에 따라 중품자기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요지일 뿐만 아니라 한국경제사 및 도자수공업사의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자편의 종류는 사발, 접시, 종지 등의 생활용기이다. 상품생산지인 어산리 상판리 일대의 자편들에 비해 다소 질이 떨어지는 듯 하나 우수한 자기를 생산했던 자기소였음은 분명한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를 증명하는 명문이 출토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사옹원은 고려 목종(제7대 998~1009)이래 상식국·사선서 등으로 불려지면서 왕실의 음식물을 조리·공급하는 관사로서 존재하였던 곳이다. 사옹원의 소임에 대해서 『경국대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옹원은 대궐 내의 어선과 어궤를 관장하는 중앙관사로서 다음과 같은 관인을 배치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즉 도제조 1명, 제조 4명, 부제조 5명, 제거·제검 각 4명, 주부 1명이 상주하며, 이 밖에 대궐 내의 식사일을 담당하는 반감등 390여명의 각급 차비(천역)가 있다” 위의 자료에서와 같이, 사옹원의 소임은 결코 관어용도자기를 생산하거나 지방관요(관요)를 통괄하기 위한 관사가 아니라 대궐 내의 식사일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따라서 “우하리 요지에서 생산된 자기(그릇)를 중앙관서인 사옹원에 공납하였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6. 마무리 이상에서 『세종실록』《지리지》의 중품이라고 추정되는 우하리요지의 출토자료 및 사료를 분석하였다. 우하리는 세종 당시 중품생산지인 공성현 원동으로 추정됨에 따라 중품자기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요지일 뿐만 아니라 한국도자수공업사의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출토 자편들의 대부분은 생활용기들이다. 특히 “선膳”자가 흑상감된 대접편이 출토됨으로서 명백한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즉 우하리 요지는 세종 당시(1420년대) 음식을 관장하는 중앙 관청의 하나인 사선서司膳署에 공납貢納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었다. 끝. 1) 여기에서 일반연구라 함은 경제사학적인 연구 이외의 기타부문의 연구범위를 말한다. 즉 미술사학적 측면이 강한 민속 사학적, 문화재적, 그리고 역사학적 등의 연구들을 지칭한다. 2) 이 시기에 생산된 청자상감, 인화, 귀얄 등은 청자의 일종인 분청사기이다. 우리나라의 전통도자는 거의 환원번조에 의해 구워진 것이다 3) 강경숙,『전게서』, p. 13. 4) 조봉환,『도자기공업』, 이공도서출판사, 1981, pp. 23-26. 5) 이희선, 분청사기의 제조공정 및 분석실험,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론문, 1975, pp. 34-36. 6) 강경숙,『전게서』, p.16. 7) 정두희, “고려말기의 첨설직”, 진단학보 제44호, 진단학회, 1977, pp. 39-51. 8) 강경숙의 전게서에서는 세종기의 문화적기반에 대하여, “그러므로 보다 광범한 사회적 기반을 가진 사회계급의 형성으로 고려귀족문화가 자취를 감추고 특히 15세기 조선조에서는 재지량반세력인 사림파가 서원과 향약을 중심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분청사기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조선왕조를 개창한 이성계 및 개국공신들은 처음 고려의 유제를 따랐으나 3대 태종 때 고려의 유제를 대폭 개혁하여 왕권강화에 박차를 가한 결과 문물제도가 완비되어 조선왕조 500년의 제도적인 기반이 닦였다. 그러므로 1418년에 즉위한 세종이야말로 닦여진 기반과 제도 위에서 민족문화의 기틀을 정립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고 설명한다. 9) 초기조사는 이미 2001. 5. 20.(일), 실시되었다. 현지조사 실시 결과 약 2주일 전에 가마터의 퇴적층이 도굴로 인하여 파괴되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상주시청 문화공보과 사실을 알리고, 상주지역의 분청사기 가마터의 중요성을 관계 문헌자료를 중심으로 설명하게 된다. 파괴된 우하리 가마의 보호를 위해 먼저 흐터러진 도편을 수습한 후, 심각하게 파헤쳐진 곳은 상주시청 문화공보과의 도움을 받아 파괴된 퇴적층에 흙주머니를 만들어 채움으로써 응급조치를 하였다. 노출된 도편은 수습하여 분류하고 자연과학적 분석을 위해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공예디자인학과 도자기실습실에 임시 보관하였다. 10) 『경국대전』, 이전, 경관직조 및 형전, 관내차편. 참고문헌 ·『경국대전』 ·『경상도지리지』 ·『경상도속찬지리지』 ·『고려사』 ·『고려사절요』 ·『상산지』 ·『세종실록지리지』 ·강경숙, 『분청사기 연구』, 일지사, 1987. · 김세광,『상주의 도자생산과 요지』, 상주문화총서제3집, 1999. · 고유섭, “고려도자와 이조도자”. 한국미술사 급미학논공, 196. ·『고려청자』, 삼성문고, 1976. ·구로역사연구소, 『바로보는 우리역사』, 기름출판사, 1991. ·백남운, 『조선봉건사회경제사』, 이론과 실천, 1994. ·이희선, 분청사기의 제조공정 및 분석실험,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론문, 1975. ·윤용이, 『한국도자사연구』, 문예출판사, 1994. ·이호철, “조선시대의 인구규모 추계”, 농업경제사연구, 경북대출판부, 1992. ·상주문화원, 『상주문화유적』, 1996. ·조봉환,『도자기공업』, 이공도서출판사, 1981. ·정두희, “고려말기의 첨설직”, 진단학보 제44호, 진단학회, 197. ·홍희유, 『조선중세수공업사 연구』, 오월사, 1988. ·최순우, “한국청자도요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한국미술 2000년 (청자)』, 문공부편, 1973. ·『한국미술전집』3 (토기, 토우, 와전), 동화출판사, 1974.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상주 청리유적 발굴조사 개보Ⅱ, 1997.4. ·상주시·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상주시문화유적분포지도, 2002. ·한글학회지은 한국지명총람 5 경북 편, 한글학회, 1978. ·북촌수, “고려시대の소제도について”, 조선학보 제 50집, 1969. ·야수건,『고려도자の연구』, 청 사, 1994.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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