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수아 _ 홍익대학교 도예연구센터 연구원
20세기 초반, 혁명이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에서 일어난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은 예술의 미적 감각과 역사에 대한 의식, 그리고 작업소재와 공간을 확대·확산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운동으로 인해 기존의 예술은 새로운 개념, 새로운 작업들에 의한 도전에 직면하고, 급진적인 변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 안에서 도예가 점한 부분은 상당히 크고, 매우 특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관한 내용은 현재까지 러시아 국내를 제외하고는 해외에서 거의 소개되지 않았었고, 그에 관한 출판물 등의 자료 역시 매우 드문 실정이다. 시기적으로는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이러한 점에서 지난 2003년에 일본에서 개최되었던 「러시아 아방가르드 도예전-모던 디자인의 실험-」을 국내에 소개하는 것은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며, 올해가 러시아 제1차 혁명 이후 100년이 되는 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2003년 4월 26일부터 같은 해 11월 30일까지 일본의 기후현현대도예미술관, 이바라기현도예미술관, 사가현립도예의숲도예관 등 세 개의 미술관에서, 각 지역 NHK 방송국의 주최로 <러시아 아방가르드 도예전-모던 디자인의 실험>이 개최되었다.
약간은 생소한 러시아의 도자기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느낄 수 있었고, 사회개혁운동의 도구로서 도자기가 어떻게 이용될 수 있었는가를 알아본다는 점에서 한편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이 전시는 4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전위예술과 디자인>은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이끌어갔던 전위예술가 또는 그 제자들에 의한 디자인 작품이었으며 두 번째, <혁명과 디자인>은 혁명 직후, 선전선동을 목적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으로서, 슬로건이나 레닌 등의 혁명주의 도자를 소재로 하는 작품이었다. 세 번째, <전통과 디자인>은 러시아의 도자기 혹은 문화의 전통에 기반 한 주제를 새로운 감각으로 디자인에 끌어들여 표현한 작품이었으며 네 번째, <신생활과 디자인>은 혁명 이후에 건설되어 온 사회주의 국가의 새로운 생활을 위해 제작된 작품이다.
이 글에서는 이 중, 첫 번째 <전위예술과 디자인>, 두 번째<혁명과 디자인> 두 개의 파트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Ⅰ.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
미술대사전에서는 아방가르드avant-garde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아방가르드avant-garde(프). ‘전위’라는 뜻. 원래는 부대의 앞에서 미지의 외적에 접촉하여 가는 첨병을 뜻하는 군사용어. 그것에서 유래하여 예술용어로는 l’art d’avant-garde(전위예술)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일반적으로는 현대예술의 전통을 파괴하는 혁신적인 예술가와 그 창작, 경향을 가리키나 이 말이 제1차 세계대전 후 많이 쓰일 때에는 쉬르레알리즘과 추상, 비합리주의와 합리주의와의 격렬한 대결을 통하여 통합을 목표로 하는 전위적인 창작정신의 호칭이었다.(『미술대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p. 517)
러시아의 아방가르드 미술은 혁명 전후 산업사회로 탈바꿈하던 시대적 상황과 분위기에 의해, 미술이 정신적 연대감을 매개로 산업현장과 직결될 수 있다는 형태로 나타났다. 프랑스의 입체주의, 이태리의 미래주의와 함께 기존 미술의 관습적 틀을 넘어서 실험적 분위기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문화예술 전 장르를 통해 공동 작업으로 진행시켰다는 운동적 개념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어, 서구의 실험적 태도보다 더 큰 파급효과를 가질 수 있었다. 이에 따라 형식이나 내용, 색채 및 재료, 텍스추어, 공간감, 그리고 다이나믹 한 실험주의로 후에 기하학적 추상이나 미니멀리즘, 컨셉추얼 아트, 키네틱 아트를 파생시키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요컨대,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은 종래의 미술을 새로운 시각으로 파악하려는 실험정신이 핵심이 되었고, 혁명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맞물려 혁명사상과 새로운 기술을 연결하고자 하였으며, 무대예술, 환경미술, 응용미술에 이르기까지 넓은 분야로 확장하게 되었다.
Ⅱ. 아방가르드와 도예
1. 선동자기煽動磁器의 작가와 작품
선동이란 문서나 언동으로 대중의 감정을 부채질하여 일정한 행동대열에 참여하도록 고무·격려하는 행위를 말한다. 선동을 목적으로 제작된 도자기를 선동자기라고 하는데, 이러한 작품군이 탄생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사회에서 도자기가 얼마만큼 유행하였는지를 나타내고 있다. 10월 혁명 전후에 선동자기제작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은 페트르그라드의 국립자기공장이었다. 이 공장의 미술부문은 화가 S.V.체호닌(1878-1936)이 감독하였다. 그와 함께 M.M.아다모비체, R.F.비르데 등 많은 도예가가 일했다.
10월 혁명에 의해 탄생한 선동자기는 당시의 포스터나 플랭카드, 정기간행물 등에 쓰여진 슬로건·표어 등을 소재로 하였다. 그들의 주요한 테마는 계급투쟁이나 사회주의적 윤리에 관한 것이었다. 1918~19년에 체호닌은 슬로건을 그려 넣은 접시시리즈를 제작했다(사진1, 2, 3, 4). 새로운 문양을 접시의 중앙에 넣은 「꽃잎문양접시」(사진5, 6), 「붉은리본문양접시」(사진7)는 러시아 도예의 새로운 표현기법을 나타내는 모범적인 작품이 되었다.
아다모비체는 당시 인기가 있었던 슬로건을 이용하여, 「레닌초상화접시-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사진8)를 디자인했다. 그는 1919~21년에 붉은군대에 종군했던 경험을 살려, 붉은군 창립5주년을 기념하는 「붉은군병사그림접시」(사진9), 「의용병그림접시」(사진10) 등의 작품을 통해 소비에트사회의 새로운 영웅에 초점을 맞추었다.
비르데는 1906년부터 30년대 중반까지 국립자기공장에서 일했다. 선동자기의 제작에는 그와 같이 혁명 전에 미술교육을 받았던 전문가들도 참여했다. 전통적인 도예기법에 정통했던 이 작가들은 혁명 후의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문제에 집중하여, 격동하는 시대의 에너지나 분위기까지도 전해주는 도예를 탄생시켰다.(사진11, 12, 13)
러시아 구성주의의 창시자인 V.E 타틀린(1885~1953)은 현실의 공간 내에서 소재를 구축한다고 하는 독창적인 무대상예술을 창조했고, 그것은 금속·나무·종이·유리·석고·타르 등의 여러 종류의 재료를 구성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타틀린은 예술과 과학기술의 조화가 가진 상호관계를 모색하고, 새로운 사회건설에 예술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것에 노력했다. 그는 1920년대에 일상생활에 필요한 가구·의상·식기(사진14) 디자인에 주력했다. 또한 1927~31년에 국립예술기술학교의 도예부에서 A.G 소트니코프나 P.M 코진 등의 제자를 키워내기도 했는데, 이들은 타틀린의 독창적인 조형사상을 도예분야에서 발전시켰다.
절대주의의 창시자인 K.S.말레비치(1878~1935)는 자연 형태의 재현을 거부하고, 직감적 이성에 의해 창조된 기하학적 형태에 의해 회화를 구성하였다. 그는 판화·삽화·무대미술·의상·텍스타일·도자기 등의 분야에서도 절대주의를 탐구했는데, 「Tea Set」는 절대주의 예술언어의 기본형태인 원, 사각형, 십자형 등을 삼차원적 입체로 구현한 작품이다.(사진15)
말레비치의 후계자 N.M.스에틴(1897~1954)과 I.G.차시니크(1902~1928)는 회화·건축·디자인 분야에서 절대주의를 발전시켰고 많은 도자기작품을 남겼다. 차시니크는 1923년경 국립자기공장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며 절대주의의 기하학적형태를 이용하여 독창적인 디자인을 탄생시켰다. 그는 주로 티팟, 컵과 컵받침, 머그컵, 바구니, 우유병, 밀가루통 등의 흰색 바탕의 기형에 어두운 색, 특히 검은색을 지배적으로 이용한 절대주의 디자인을 배합하는 방법을 이용하였다(사진16). 또한 회화·건축설계에 그치지 않고 포스터·옷·책의 삽화·선전용 스탠드·연단 등을 디자인하기도 하였다. N.M.스에틴도 1922년말부터 23년까지 국립자기공장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며, 절대주의 구도의 모티브를 재검토해 디자인을 만들어냈다. 그는 커피세트, 티세트, 컵과 컵받침, 접시 등의 흰 공간을 흑색 적색 황색 청색 자색의 기하학적형태의 문양으로 채워 넣은 작품들(사진17)을 제작했다. 또한 그는 특이한 기형의 잉크병(사진18)을 디자인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절대주의의 「건축구조체」의 모델을 자기에 응용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아방가르드와 도예
절대주의, 구성주의, 생산주의 등의 이념을 중심으로 했던 1920년대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에서 다른 장르에 비해 도예가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은 크게 다음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요인은, 도자기의 제작방식에 관한 것이다.
당시 산업화와 기계는 새로운 유토피아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미술작가와 기술자의 차이는 점차 사라지고, 미술가들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함으로써 그들의 신념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도자기라는 매체는 수공으로 제작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산업혁명 이후에 도자사에서의 근대기가 시작되며 공장에서 양산되는 도자기가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제품들은 전통공예의 침체, 조악한 품질 등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낳기도 했는데 그 반면 저렴한 가격이나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점 등으로 도자기의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도자기의 제작방법 중, 석고형틀을 이용하여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기물에 원하는 이미지를 전사하는 방식은 당시 생산주의 이념을 실현하고자 하는 미술가들의 요구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요인은, 도자기의 성격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구성주의의 타틀린은 사회적 편익, 즉 유용성을 강조하며 ‘생활 속의 예술Art into life’을 주장했고, 로드첸코를 위시한 생산주의자들은 미술은 사회주의 사회의 생활 향상에 직접적으로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자기라는 장르가 실용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현대의 도조陶彫 등에서는 실용성을 배제한 채 예술적 미감만을 추구하는 작품도 종종 보여지긴 하지만, 전통적으로 도자기는 실생활에서 쓰여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렇듯 쓸모와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있는, 실용성을 가진 예술품이라는 특별한 성격을 가진 도자기는 그들의 주장을 구현하는데 가장 적절한 매체였을 것이다.
Ⅳ. 결론
러시아 아방가르드 도예는 1900년대 초, 혁명이라는 러시아의 특수한 사회상황과 맞물려 그것이 요구하는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러시아의 예술가들은 선전의 도구를 순수미술에 한정하지 않고, 환경미술이나 응용미술의 분야까지 확장하였다. 도예도 아방가르드 조형사고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로 선전선동이나 국민의 의식 계몽 등의 목적을 뚜렷이 드러내는 작품들이 많이 제작될 수 있었다. 공장에서의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점,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점 등의 특수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도자기는 구성주의나 생산주의의 이념을 표현하는데 다른 어떤 매체보다 효과적이었고 이러한 성격은 당시 미술가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도예는 소비에트 정권 초기의 대변혁시대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세계도예사상 유례없는 독특한 작품군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도예는 예술이 시대나 사회 등의 외부환경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예술 본래의 기능 외에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형태로 발전했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사진자료출처 : 러시아 아방가르드 도예전 도록, 2003, NHK, NHK 프로모션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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